김영하 작가는 TV프로그램 <알쓸신잡 - 춘천편>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이야기로 받아들일 때 깊이 결부된다'라고 말했다. 꽃말로 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잘 기억하고 관심 갖게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여행 또한 같다고 생각한다.
지역마다 더 작게는 마을마다 갖고 있는 꽃말이 있다. 국사책에 나올 법한 역사 이야기나 현재 그곳에서 유행하는 특정 음식 혹은 사는 사람들이 만든 문화 등 특색이 피어있다. 이번에 다녀온 인천광역시 강화군도 그랬다.
강화도는 여행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몇 번 가본 곳이다. 주말마다 차가 밀리는 곳이었고 특별히 어디가 정말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잊을 때쯤 한 번씩 다녀왔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점은 '어디가 정말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거다. 분명 갈 때마다 즐거웠는데 누가 물어보면 '어... 그냥 좋아'라고 성의 없어 보이게 대답할 수밖에 없어 강화군을 추천해 본 적이 없다. 경주·공주·부여·포항.... 나름 여행이 업(業)인 사람이라고 주변에서 국내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 많이 요청하지만, '강화군은 어때?'라고 대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말했어도 그냥 좋다고 하면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도움 될 리도 없고.
그런데 이번에 그 이유를 얻을 수 있었다. 마치 게임에서 최종 보스를 이겼을 때의 기분이었다. 내적 '이야호~!'였으니까. 그 계기를 만들어준 게 <DMZ 평화의 길> 테마여행 프로그램이다.
'DMZ 평화의 길' 프로그램은 한국관광공사와 문화체육관광부 그리고 *지자체가 함께 하는 당일 테마여행 상품이다. 분단의 아픔과 자연 생태계의 보고 그리고 평화에 대한 바람이 모두 담긴 DMZ를 여행하며 그 지역을 이해하는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DMZ 평화의 길은 지역 단위로 분류되어 여러 코스가 있는데, 강화 코스에는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 [강화평화전망대], [의두분초], [대룡시장] 그리고 [화개정원]이 속해 있다. 민간인 통제선과 남방한계선 주변에 있는 여행지들을 여행해 <평화의 길>이라는 여행 상품 컨셉과 잘 어울리는 구성이다.
DMZ 강화코스 안내 (출처. 두루누비)
테마여행의 장점은 A여행지 B여행지... 이런 작은 단위의 장소에서 더 시야를 넓혀 지역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행지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지역에 대한 영감과 잔상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이번 강화도 여행은 이전에 강화도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영감과 잔상이 생겼다.
한때 일반인의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철산리에 들어선 '강화평화전망대'와 '의두분초'는 마치 어린이가 처음 놀이공원에 들어섰을 때의 흥분감을 느끼게 한다. 다른 나라라고 하기에는 북한이 너무 가깝기 때문인데 성산일출봉 위에서 우도를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예산강 건너에 차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모내기철에는 몇십 명의 사람들이 농사짓는 모습도 쉽게 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예산강을 건너 의두분초로 귀순한 사례가 있는데 인솔자를 통해 듣기로 북한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이 있어 유속이 잠깐 멈추는 짧은 찰나에 강을 건너 남한으로 온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의두분초는 현재 군사시설임과 동시에 과거 외적의 침입을 대비할 목적으로 바위를 쌓아 지은 '의두돈대'라는 역사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숙종 때 지어졌는데 현재까지 북한의 침입을 대비해 해병대가 지키고 있으니 오랜 세월 동일한 역할을 지니고 있는 게 시간이 멈춘 듯하면서도 휴전 상태라는 걸 체감하게 한다. 목적답게 실제로 의두돈대에 오르면 평화전망대보다 훨씬 가까이 북한을 볼 수 있다.
의두돈대를 보고 나면 철책선 바로 옆을 따라 난 길을 걸을 차례다. TV에서 가끔 군인들이 철책선을 점검하려고 흔들며 걷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구간이 DMZ 평화의 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어쩌다 철책선을 *건드릴까 봐 최대한 반대 구석으로 조심조심 걸었다. 행여나 넘어져서 건드릴 수도 있으니 바닥도 자주 보고. 남방한계선 곁을 걸으면서 신나게 뛰어가는 노루도 보고 함부로 이사도 못 가는 마을의 모내기를 마친 논도 보고 북한도 보고....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구간이었다. 아무 곳이나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어 갖게 되는 약간의 긴장감 또한 해외여행에나 느낄 법한 기분이라 특별했다.
강화도에서 가장 핫한 여행지를 꼽으라면 '대룡시장'과 '화개정원'일 거다. 북한 황해도 연해군과 마주 보고 있는 교동도에 모두 있다. 대룡시장과 화개정원은 위치만 들어도 상당한 스토리가 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역시나.
대룡시장은 6.25 전쟁 시절 피란민들이 정착해 만든 시장이라고 한다. 실향민들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먹거리가 다양하고 많다. 국수나 국밥 같은 식사류부터 과일찹쌀떡·컵빙수·미숫가루맛 슬러시·수제감자칩 등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생겨난 디저트류까지 품목이 다양해 누구나 하나 이상의 먹고 싶은 음식을 만나게 된다. 사연 있는 대룡시장에서 사연 있는 음식을 만나고 싶다면 '강아지떡'을 먹어야 한다. 실향민들이 어린 시절 북쪽 고향에서 먹던 떡으로 진짜 쑥떡 안에 팥을 넣어 못생기게 만든 떡이다. 맛은 전혀 못생기지 않은 게 반전. 대룡시장에 전반적으로 쑥떡들이 과거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맛 또한 쑥색만큼 진해 옛날 맛이 그리운 어르신들께는 충분한 식사대용과 추억을 소환시켜 주는 매개체가 된다.
게다가 대룡시장 뒤로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촬영지인 대룡초등학교도 있으니 오감만족 여행지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법도 하다.
대룡시장에서 유명하다는 옥수수술빵을 사 왔는데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옥수수술빵은 부풀어 오른 생김새와 비례한 맛이다. 옥수수술빵 마니아로써 지금까지 먹어본 전국 술빵 중 세 손가락 안에 가뿐히 들어간다.
화개정원은 올해 5월 개장한 스카이워크&모노레일로 더욱더 인기가 많아진 곳이다. 화개산에 있는 화개정원은 기존에 있었던 테마형 정원인데, 산 위에 스카이워크가 생겨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스카이워크는 어느 지역이나 인기 있는 명소가 된다. 화개정원에 갔을 때도 세 시간 뒤부터 탑승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꼭 모노레일을 타지 않아도 화개정원은 각 길마다 이야기가 있어 걷는 재미가 있으니 혹시 모노레일을 못 타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중 '연산군 유배지'와 '솥뚜껑'이 주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연산군 유배지에서는 연산군이 최후를 맞이한 위리안치 유배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가집과 연산군 마네킹까지 재현이 그럴싸해 보다 즐겁게 역사를 접할 수 있다.
교동도는 연산군이 아니어도 조선시대 왕족의 주요 유배지 중 하나였다. 광해군과 안평대군·임해군·경안군 등 무려 천여 년 동안 왕족들의 단골 유배지였다. 서울과 가까워 격리 감시를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게 단골 유배지가 된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싸한 예상이다.
여행 전 날, 강화도를 간다고 하니 엄마께서 '솥뚜껑 있는 데 가겠네'해서 무슨 소린가 했다. 그런데 정말 화개정원에 솥뚜껑이 있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솥뚜껑이 화개정원이 위치한 화개산과 연결 고리가 있더라. 화개산이 꼭 솥뚜껑을 덮어 놓은 모양 같다고 해 화개산이라 불리게 된 거라고. 산 모양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 산을 보고 솥뚜껑을 생각해 낸 과거 사람들이 재치 있다.
이번 여행에서 얻어온 꽃말은 '극복'이다.
극복의 사전적 정의는 악조건이나 고생을 이겨낸다는 뜻이다.
숙종 때 쌓아 올린 의두분대부터 왕족들의 유배지를 지나 6.25 전쟁과 실향민 그리고 철책선까지. 거대한 역사가 현재 2023년에 도달하는 동안 강화군에는 헤아릴 수 없는 크기의 긴장과 슬픔이 자주 머물렀다.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한강과 연결된 강을 곁에 두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철책선이 그어졌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두 감정은 말끔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강화도의 꽃말은 다소 우울할 뻔했다.
하지만 강화군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개인 한 명 한 명의 꽃말이 진취적이고 희망적이다. 과거부터 그랬다. 내 나라 혹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을 지키겠다는 마음.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마음. 제1의 고향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 모든 게 그저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이 모이고 모여 강화군에는 매일같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웃고 먹고 걸으며 즐겁게 여행한다. 아이만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다.
번외로 필자와 같이 여행에 큰돈을 쓰지 못하는 배낭여행자에게도 강화군은 극복의 지역이 맞다. 프로그램 참가비가 만원밖에 안 한다. 요즘 만원으로 식당에서 밥 한 끼 원하는 메뉴 사 먹기도 힘든데 그야말로 만원의 행복이 있는 프로그램을 강화군이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강화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포 고양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고성 등 열 개의 지역을 코스로 두어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의두분초와 의두돈대는 모두 중요 군사시설이라 휴대폰과 카메라 모두 소지할 수 없고 절대 철책선을 만지면 안 된다(감지되는 순간 일대 DMZ는 비상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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