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단번에 마음에 들어오는 곳들이 있다. 누군가 "거기가 왜 좋아?"라고 물으면 이유는 뾰족하게 말하기 어려운데 그냥 좋은, 그래서 누군가를 설득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추천하고 싶은 그런 곳들이다.
충청도 부여는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가장 아끼는 지역 중 하나다. 가장 아낀다고 해서 밥 먹듯이 가는 건 아니지만, 갈 때마다 안정감이 들어 스스로는 '충청도에 있는 제주도'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제주도 마을 골목골목을 걸을 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수많은 생각을 모두 잊고 오직 눈앞에 나타나고 코앞을 스치는 것들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게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생각하는데, 그 이유를 잘실감할 수 있는 국내여행지가 부여라고 생각한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 걷는 여행을 하기 참 애매한 날씨에 부여를 찾았다. 비가 오는데도 극성수기라 도로 위에 차량이 가득했는데 역시나. 부여는 조용하더라. 역사책에서 많이 봤을 도시임에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부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선택도 잘 안 한다. 덕분에 나만 아는 맛집을 찾아온 것처럼 혼자 뚜벅뚜벅 도시를 쏘다녔다. 분명 맛집인데 소문이 안 난다. 오히려 좋아!
북적임이 보이지 않는 부여는 '비 오는 날의 부여는 이런 곳이다'를 알아채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아끼는 이유를 찾을 절호의 찬스였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작품이 가득한 곳
여름의 부여를 '색(色)'으로 표현하라 하면 분명 '초록색'이다. 물기 묻은 붓으로 칠한 수채화 같은 초록색 그림이다. 그 생각을 처음 들게 한 곳은 과거 백제의 별궁 연못이었던 '궁남지'다.
연꽃이 피기 전 둥근 잎마리만 동동 떠있는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은 숱이 많았다. 조금만 더 나무가 많았으면 연못보다는 숲이나 정글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울창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궁남지가 보여주는 자연의 깊이에 감동한 건 동물들도 마찬가지인지 다양한 새와 오리들의 일상도 볼 수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궁남지를 바라보는데 문득 최근 일 년 사이에 다섯 개의 연작을 본 모네의 <수련>이 떠올랐다. 아, 이런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네가 점점 나빠지는 시력으로 바라본 연못을 그렸다는 <수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궁남지에 대입해도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았다. 비가 온 뒤라 형체에 물기가 스며들어 더 그렇게 보였다. 축축해도 채도가 밝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연못이었다.
모네의 수련
그리고 부여의 궁남지
부여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뭐냐는 질문에 단번에 대답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 64CM 지름 20CM의 꽤 키가 큰 금동향로로,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부여군에서도 부여국립박물관에서도 자랑으로 삼는 것을 여러 공식 사이트만 가봐도 눈치챌 수 있는데 그럴만하다는 건 직접 봐야 공감할 수 있다.
국사를 좋아해 전국을 여행하면서 국립박물관을 챙겨 다니고 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향로는 처음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입체적인 외관과 안에 들어간 동적인 요소들이 세밀해 "우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는 왜 부여국립박물관을 이제야 왔는지 스스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이마를 짚었다. 잊히지 않을 대향로와의 첫 만남이다.
용이 향로 몸체를 입으로 물어 올린 모습을 띄고 있는 받침. 연꽃잎 곳곳에 있는 상상 속 동물들.다섯 명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모습까지 모두 그대로 볼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천 년이 넘은 뒤 발견되었지만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분에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숨을 들이마신 채 내쉬지 못할만큼 놀라운 요소 하나하나를 온전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천 년 전의 모습을 지금 보고 있다 생각하니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디테일이 소름 돋을 지경이다
주차장 공사 중 처음 발견되었다는 이 보물이 영영 땅에 묻혀있었다면 향로에게도 우리에게도 너무 아까운 일이었을 것 같다. 향로도 우리도 운이 좋았다.
꼭 특정 지을 수 있는 무언가만 부여를 작품처럼 보이게 한 건 아니다.
부여를 뚜벅이로 여행하다 보면 부여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숙소였던 게스트하우스가 마을 깊숙이 위치해 숙소를 나설 때마다 구불구불한 마을 길을 걸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봤던 논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모내기하기 전 모종이 이렇게 생겼구나'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종 더미를 보고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있는 논으로 시선을 옮기니 들이는 정성과 시간이 백제금동대향로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카메라 셔터를 누른 공간이었다.
수확하는 계절까지 온전하게 잘 자라기를!
논이 보일 때마다 과거 완도전복생산자협동조합 이용규 사장님의 인터뷰에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 지역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백제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이제 부여의 역사로 현재진행형인 이 도시의 주축은 사람이다. 사람이 전설 속 예술품 같은 대향로를 만들고 그림 같은 연못을 만들고 생명력이 깃든 논을 일구어 부여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다.
이처럼 도시 전체가 '예술이야!'를 외치게 하는 부여는 지금도 역사를 쌓아가고 또 발굴하고 있다. 앞으로도 자주 부여를 여행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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