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중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그것도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아무리 식당 한 번 안 가고 빵으로 끼니를 채우는 여정을 하고 있더라도 프랑스 파리에서 꼭 돈을 써야 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디즈니랜드. 디즈니랜드는 여러 도시에 있는 만큼 갈 기회는 앞으로도 충분하지만 미키마우스에 대한 대우가 유독 톡톡한 곳이 파리 디즈니랜드이기 때문이다. 미키 마우스 무늬만 봐도 눈이 뒤집히는 어른이 여행자는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가기로 계획한 예정일 직전까지 날씨를 잘 보고 있다가 자유이용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당일, 개장 한 시간 전에 디즈니랜드 입구에 도착했다.
파리 디즈니랜드는 두 개의 테마파크로 이루어져 있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영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조성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와 보통 디즈니랜드 할 때 떠올리는 아름다운 성과 디즈니 캐릭터들이 있는 '디즈니랜드 파크'가 있다. 자유이용권이자 입장권으로 이 두 동을 모두 왔다 갔다-하며 즐길 수 있다.
환타지아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분수대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가장 선조 격인 영상 콘텐츠를 꼽자면 <판타지아>다. 꼭 단군신화같이 대하지 않더라도 나 또한 디즈니 영상 콘텐츠의 정수는 '판타지아'라고 생각한다. 요즘에 와서 판타지아와 비슷한 걸 찾자면 디즈니에서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앞에 에필로그처럼 붙는 단편 영화라고 보면 된다. 클래식 음악에 맞춰 여러 에피소드가 펼쳐지는데 대사 없이도 시선을 붙잡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디즈니의 힘이 느껴진다.
환타지아의 에피소드 중 가장 많이 다시 본 에피소드는 '마법사의 제자'다. 제목 그대로 미키가 마법사의 제자로 나오는데, 마법사만 쓸 수 있는 흰색 별 무늬가 그려진 파란색 마법사 모자를 몰래 훔쳐 썼다가 사고를 치는 이야기다(사고도 보통 사고가 아닌데 그게 전체 스토리다).
파리 디즈니랜드에서는 입구에서부터 이 판타지아의 일부를 볼 수 있다. 마법에 걸려 미키가 손수 들어야 했던 물통을 대신 들어 옮기는 빗자루의 역동적인 모습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다. 조형물 하나만으로도 물을 퍼 나르는 빗자루들의 행진이 줄줄 떠올랐다.
미키가 몰래 쓴 파란 마법사 모자는 건물만 한 사이즈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곳곳에서 디즈니랜드가 판타지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편으로는 잘 만든 콘텐츠 하나의 힘이 이렇게나 오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인상적으로 봤던 만큼 가장 좋아하는 미키도 판타지아에 나오는 빨간 망토를 두르고 파란색 고깔 모양 모자를 쓴 모습이다. 몇 년 전, 뉴욕 디즈니 스토어에서 그 버전 인형을 발견했는데 냉큼 사서 애착인형으로 대하고 있다. 어화둥둥이 따로 없다.
못 안고 있어서 안달인 미키를 찾아다닌 하루였다. 하루라고 해도 무방한 게 개장 전부터 일루미네이션 쇼가 펼쳐지는 폐장 때까지 종일 혼자 미키를 찾아다녔다. 카우보이 미키 인형에 아련한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미키 손을 토대로 만든 장갑을 끼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정글북 곰 발루 등 여러 디즈니 캐릭터들을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간절하게 기다린 건 역시 미키. 미키마우스는 파리 디즈니랜드에서 가장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무려 미키마우스의 집이 따로 있어 보고 싶으면 놀이기구 타듯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웬만한 놀이기구보다 오래 기다렸던 것 같다. 아무래도 미키랑 대화도 나누고 사진도 찍다 보니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않는 듯했다. 그나마 대기줄 중앙에 있던 브라운관에서 미키 마우스 에피소드들을 볼 수 있어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 반드시 봐야 한다는 기대감 섞인 의지가 들어가기도 했고.
사십 분쯤 기다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미키를 만날 수 있었다. 인형탈인 걸 알아도 나에겐 진짜 미키마우스였다. 무려 감정을 표현하는 미키였으니까. 미키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존재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때 미키는 감동한 듯 손으로 입을 막는 제스처를 취했고 팔짱을 끼자며 팔을 내밀었다. 속으로 거품 물고 뒤로 자빠질 뻔했다.
어린이 시절부터 줄곧 입은 옷만 다를 뿐 미키 인형을 손에 들고 다녔고 안고 잤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할 수 있겠지?'라며 미키에게 말을 걸었고 웃고 있는 미키를 보며 힘을 얻었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미키에게 의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미키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세계여행을 통틀어 몇 가지 인상적인 기억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반드시 이 순간은 포함된다. 사진을 찍고 집을 나왔을 때 꿈을 이룬 벅찬 기분이 들었다. 보통 행복이 아니었다.
디즈니 캐릭터를 대거 만날 수 있는 카 페스티벌을 보면서도 열심히 미키를 따라다녔다. 원하는 미키 사진을 건지기 위해 와다다닥- 찍고 달렸다. 아이돌 세계에 있는 '홈마'가 된 기분이었다.
또 타고 싶은 놀이기구들을 마지막으로 타고 일루미네이션 쇼를 맨 앞에서 보기 위해 미리 놀이공원 바닥에 앉아 기다렸다. 일몰 색이 더해져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분홍색 성을 바라보며 하루를 되돌아봤다.
꿈을 이룬 하루더라. 세계여행을 떠나온 것만으로도 큰 소원을 풀고 있는 건데 어릴 적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보다니. 그것도 프랑스 파리에서. 낭만이 치사량 초과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삶'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행복한 기분을 자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럼 나는 언제 행복하지?
결론은 '성취감'이었다. 원하는 바를 이뤄냈을 때. 갖고 싶은 걸 소유하게 됐을 때. 보고 싶었던 걸 봤을 때. 하고 싶었던 걸 할 수 있을 때. 작고 크건 바라던 걸 현실로 만들었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휴식시간마저 생산성 있는 것을 하며 시간을 채우는 이유다. 성취감을 느낀 기억이 어릴 적부터 많았고 이제 그 기쁨이 얼마나 거대한지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아니까 시간을 함부로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계속 달리고 참으면 방황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냥 다 하기 싫기도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툴툴거리면서 하기도 한다. 여행 중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호텔에서 하루 푹 쉬고 싶을 때도 있었고 돈 좀 그만 아끼고 싶다고 한숨 쉬던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건 미키마우스였다. 디즈니스토어 안에서 진열되어 있는 인형 하나에 금방 웃었고 디즈니랜드에서 만난 미키 하나로 피곤함이 성취감이 됐다. 말 못 하는 쥐 하나는 일상 속에서도 여행 중에도 큰 의지와 응원이 됐다.
도라에몽에 울고 웃는 한 연예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어릴 때 만난 캐릭터 하나가 인생의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