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렇게 다 멋있냐. 버스도 멋있어. 건물도 멋있어. 사람도 멋있어. 심지어 발음도 멋있어."
영국 드라마와 영화를 자주 봤다. 해리포터에 미쳐있었다고 해도 무방했던 시절을 제외하더라도 봐 온 영국 작품이 많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길과 건물 양식이 모니터로 봤던 그곳이었다. 설레서 상기된 기분과 심장을 애써 눌러 숨겼지만, 사실 심하게 행복했다. 런던에 있던 햄리스(Hamleys)장난감 가게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는 어린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영국을 왜 이제 왔지? 눈에 하트가 붙는 이모티콘이 실제로 가능한 표정이었다는 걸 실감했다.
비가 오면 검은색 정장 입은 영국인이 검은색 택시에서 내리며 검은색 장우산을 펼칠 것 같았다. 그리스 신전처럼 스트라이프 무늬를 낸 기둥과 창문 주위에 만든 정갈한 조각 문양들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사각형이 아니면 안 되는 건지 다닥다닥 정리되어 있다. 흐린 날씨로 채도가 한껏 떨어진 건물들의 색깔은 유난히 복사 붙여 넣기를 반복한 것 같은 검은색 모서리 둥근 택시들과 결이 잘 맞는다.
맑게 갠 날 번화가를 걸을 때면 청바지 입은 현지인들의 멋스럽게 느껴졌다. 그 장면에 빨간 이층 버스는 필수다. 채도 높은 빨간색과 청색의 조합은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 이런 걸 색감 깡패라고 하는구나.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서 생각했다.
거리만 걸으면 무조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 건물 차량 돌길 공원이 모두 예사롭지 않았다.
시간이 축적된 것들을 좋아한다. 1930년대부터 기자 작가 예술가들이 사용해 온 블랙윙(Blackwing) 연필. 사극 그 이상의 거대한 한 줄기를 간직한 서울의 고궁들. 여러 사람들의 담담한 회고록. 작고 큰 에피소드들로 만들어진 지금 나. 과거를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영국은 풍경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되는 요소들이 나라의 아이콘이 된 게 많다. 빨간 이층 버스. 검은색 택시, 벽돌 건물. 근위병의 옷차림과 동작. 공통점은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왔다는 거다. 긴 역사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벽돌 건축은 무려 로마 시대 때 시작됐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벽돌을 사용한 건축 기술을 영국에 전파했고 19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화재에 강한 건축 재료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벽돌이 또 한 번 각광받았다. 벽돌은 정말 강했는지 영국 하면 떠오르는 풍경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콘이 됐다. 영국은 그 역사를 스스로 철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뉴욕에 있는 동안 흔히 봤던 주택가 모습들과 비슷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단정함을 추구하는 깔끔한 건물들. 검은색 택시와 잘 어울리는 진갈색 건물들*에 여행 내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과거를 잘 지키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모든 것이 바뀌고 있는 지구에서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 것들을 아는 것 같은 나라라니. 여행자에게 영국은 참 멋스러운 나라다.
이동 중에 찍은 사진들이 세계여행하면서 갔던 여러 나라들에 비해 영국이 훨씬 많다. 다른 나라에서 이동 중에 열 장을 찍었다고 가정하면 영국에서는 세 배 이상의 사진을 걷다가 틱- 찍었다. 특정 여행지만큼 이동 과정에 본 것들도 큰 감상을 주었다는 근거다.
영국을 다녀왔음에도 여행지를 추천하는 글은 몇 개 못 썼다. 모두 어디라고 딱히 설명하기도 애매한 순간들만 생각난다.
*런던의 건물들은 주로 진갈색 벽돌을 사용하지만, 동남부 지역에서는 노란색 혹은 크림색 벽돌을 흔히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