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데에 날씨가 중요한 이유

by 뚜벅이는 윤슬

폴 고갱이 타히티로 이민을 결심했다거나, D.H.로렌스가 이탈리아 뉴멕시코 등 따뜻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등 과거에는 따뜻한 날씨를 찾아 이민을 가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십 대에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날씨를 이유로 거주하는 나라를 바꿀 결심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반신반의의 태도를 취했다. 몇 달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사는 나라를 바꾼다는 게 그 어떤 인생 속 중대사 중 가장 거대한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만 해도 그리 쉽게 결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나라를 옮긴다라. 그것도 더 나은 날씨가 필요해서. 이십 대였던 나는 모든 부분에 있어 몰라도 너무 몰랐던 어른이라 날씨가 그렇게 삶에 중요한지 몰랐다. 나조차도 이제 막 오픈한 가게 앞에 세워진 풍선 인형처럼 날씨 하나에 기분이 펄럭펄럭 오뚜기처럼 왔다갔다하는 사람이었는데.


2023년, 세계여행 첫 도시로 호주 시드니를 선택했다. 언제나 온난한 기후라는 호주 날씨에 대해서는 책으로 여러 차례 접해 착실하게 암기한 내용처럼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해보는 경험이 언제나 그렇듯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건 짐작과 다를 바가 없다. 청명한 하늘과 하늘만큼 넓게 온 몸으로 내리쬐는 햇빛, 그 덕분에 육지와 바다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색은 선명하고 밝았다. 태양이 껴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 그 강렬한 따뜻함이 기분을 끌어올렸다. 햇빛에 맛이 있다면 시드니에서 느낀 햇빛의 맛은 상쾌함이었다. 즐겨쓰는 콜게이트 치약으로 양치질을 한 직후의 말끔함이 느껴졌다. 오늘 몇 만 보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매일 아침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서큘러키를 산책하는 짧은 습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항구의 모양을 따라 쭉 걷다가 구글맵 평점이 좋은 젤라또 가게에서 수줍게 원하는 맛을 주문해 벤치 또는 대리석 화단에 걸터 앉아 먹기도 하고, 젤라또 가게 옆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몬드 크루아상을 사서 뜯어 먹으며 산책했다. 햇빛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면서. 시드니의 쨍한 날씨를 향한 애정은 날을 거듭할수록 젤라또의 맛처럼 진해졌다.

시드니는 일몰 시각부터 이후의 날씨까지도 거장의 그림같다. 완벽하다. 반팔에 남방이면 적당한 선선함을 느끼면서 천문대공원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봤다. 공원에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행복해보이는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일몰이 거듭됐다. 그 모든 요소를 최대한 자주 보고 싶어 일몰은 하루를 제외하고 내내 천문대공원에서 봤다.

그리고 공원에서 항구 방향으로 걸어가 서큘러키를 다시 한번 걸으며 오페라하우스의 야경을 바라봤다. 청명한 푸른색에서 검정색으로 칠을 바꾼 하늘과 바다, 그 앞에서 은은하게 하얀 자태를 빛내는 오페라하우스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우주선이 떠올랐다. 까만 우주에 있는 우주선의 모습을 닮아 SF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그러면 시드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 들어 새로운 행성을 처음 온 우주인처럼 신났다.

오페라하우스 광장 아래에는 야외 테라스 펍이 있었는데 저녁에는 언제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도 많고 무대 공연까지 있었는데 그 모든 소리가 섞여도 듣기 좋은 백색소음으로 느껴진 걸 보면 옅은 바람이 부는 날씨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원래 혼자 여행할 때는 일몰 시각 이후에는 너무 오래 밖에 있지 않는데 시드니에서는 매일 저녁을 충분히 누렸다. 그렇게 누려도 매일 그리운 시드니가 될 거라는 걸 그 때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내가 죽기 전에 이민을 결심한다면 호주 시드니가 될 거라고 2년 넘게 변함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2024년 3월초 어느 날, 스위스에서 경량패딩에 뽀글이 점퍼를 겹쳐 입다가 프랑스 니스로 향했다. 스위스 바젤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 안. 웅- 비행기가 나아가는 소리를 ASMR 삼아 졸다가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에 눈을 떴다. 구름 아래로 비행기가 낮게 내려왔을 때, 창밖으로 니스의 어느 조각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깨끗한 청량감에 과자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던 졸음이 말끔히 치워졌다. 어떻게 바다가 이렇게까지 색도 선도 말끔할 수가 있는 거지? 모서리 둥근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의 반을 차지한 청명한 바다색은 꼭 채도 높은 하늘색 시트지를 붙인 것 같았다. 입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평선 외에는 어떤 선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바다를 보고 그렇게까지 감탄한 적은 이후에도 없을 만큼 독보적인 전망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시작된 들뜬 마음 그대로 니스 곳곳을 매일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마음에 쏙 드는 정보. 비행기 안에서 봤던 니스 바다는 '코트다쥐르(Côte d'Azur)'라 불리는데 푸른 해안이라는 뜻이란다. 이름의 뜻을 알게 됐을 때 '와! 너무 적확한 이름이잖아!' 내가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흡족했다.

불과 며칠 전 눈을 밟으면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인 눈길을 걸었는데, 비행기로 한 시간 반만에 맨투맨 하나면 충분한(어느 날은 반팔에 얇은 셔츠면 충분한) 봄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계절의 선을 넘게 해주는 환절기도 없이 덜컥 만난 따뜻함 덕분에 기내에서 봤던 바다 색을 매일 볼 수 있었다.

니스의 해변은 아침에도 대낮에도 어두워졌을 때도 툭, 건드리면 투명한 소리를 낼 것 같았다. 발 앞으로는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밀려 오지만, 멀리서 파도가 일렁이는지도 모르겠는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 바다에서는 다른 종류의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호들갑을 떨었던 당시의 과장 가득한 생각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다음 생에는 니스가 주 활동지인 물고기로 태어나도 좋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한 달을 체험하듯 살아본 것을 제외하면 바다를 근처에 두고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바닷가에 살고 싶다고 바랐던 적은 없었는데 니스에서 처음으로 바닷가에 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다.

진분홍색, 짙은 보라색, 때로는 주황색과 금색 사이의 일몰도 실컷 누렸다. 해가 강한 시간대에도 테라스석에 손님들이 편히 앉을 수 있도록 펼친 어닝과 간판 색상의 쨍한 채도로 보기 좋았다. 시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꽃들의 모습도 그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강해보여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세계여행 내내 잘 데리고 있다가 한국까지 가져가고 싶었다. 꽃을 보면 이 안온한 일상을 만들어주는 맑고 따뜻한 날씨도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방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욕심에 든 생각이었다.

앙리 마티스는 니스의 색채를 사랑했다는데 그 마음과 감히 같다고 말하고 싶다. 햇빛을 가득 품은 니스를 지금도 사랑하고 또 자주 생각하고 있다.


이후에도 파랗고 따뜻한 날씨에 몸 상태가 훅, 좋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경험은 차곡차곡 쌓였다. 건기의 베트남 나트랑에서 매일 밤산책을 하며 가벼운 바람을 맞았고, 3월의 이탈리아 친퀘테레에서 30색 크레파스를 다 사용한 것 같은 마을을 쾌청한 날씨 덕분에 제대로 봤고, 출장으로 갔던 일본 오키나와에서 테마파크같은 거리의 쨍한 색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더 자주 경험했다. 봄과 가을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완벽한 나날들. 고궁을 걷기에 가장 좋은 날, 운동화가 잘 어울리는 날, 반팔에 얇은 셔츠가 적당한 날, 카메라를 들고 나가고 싶은 날 등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씨에 수식어를 여러 개 붙이면서 꾸준히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밖수니(집수니의 반댓말. 집에서 잠만 자는 것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한다)'라는 별명을 계속 달고 살면서 최선을 다해 누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날씨만으로도 이민을 결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날씨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큰 추진력이 되는지 이제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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