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 갈 때마다 기대할 수밖에

by 뚜벅이는 윤슬

2023년 이후로 오랜만에 여수를 다시 찾았다. 여수엑스포역을 향해 달리는 KTX 열차 안에서도 펜션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목표는 '온전히 쉬는 것' 딱 하나였다.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면서 헤매고 또 시도했던 한 해를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올해 계속 생각이 많았다. 돈은 없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았고, 동시에 하고 싶지 않지만 돈을 벌려면 해야 했던 것들 또한 많았다. 꾸역꾸역 참고 살다가 에라 모르겠다, 다 놓고 싶은 때도 몇 차례 있었는데 천상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뽈뽈이 성향의 소유자답게 놓지 못했다. 공부를 아예 놓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하지도 않았던 학창 시절이 연상되는 시간들이 대거 포함된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싶어 혼자 배낭 하나 매고 여수로 향했다.


목표가 그랬듯이 숙소에 있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이순신광장에서 점심 식사부터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음식들을 배낭에 넣고 한 손에 들고 숙소로 향했다. 그 뒤로는 숙소 거실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일기를 쓰고 바다를 보며 지냈다. 마치 나영석 PD님은 한 프로그램에서 실패작이라고 말하셨지만, 나는 어쩐지 끌렸던 예능 프로그램 <숲 속의 작은 집> 내용처럼 단순한 하루를 보냈다.

원형 테이블이 있는 작은 거실에는 흰색의 원형 테이블이 있고 앞에는 통창에 가까운 벽의 80%를 차지하는 높고 넓은 창문이 있다. 창문 반대편에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어 한창 가사에 빠져있는 루시의 <사랑은 어쩌고>를 반복 재생했다. 집에서 가져온 손만 한 노트와 연필 그리고 책 <당신이 뉴욕에 간다면 멋질 거예요> 한 권을 사부작사부작 갖고 놀면서 객실 바로 앞에 있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돌산대교를 수시로 바라봤다. 바다가 이번 여행의 킥이었는데 여수밤바다 노래를 그렇게 들었어도 여수 바다가 이렇게 고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줄 몰랐다. 낮부터 밤까지 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보다가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를 반복했다. 가만히 잔잔한 바다를 보다가 색감이 달라진 것 같다 싶으면 신발을 구겨 신고 객실 문을 열었다. 객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객실 문만 열어도 선명한 바다에 안길 수 있었다.

날씨가 도와준 덕분에 일몰의 전 과정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조용히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그려진 자잘하고 유연한 물결. 그 위에 동동 떠 있는 황금색 햇빛. 그 시작인 해가 점점 내려가는 모습.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면 해 모양이 별과 비슷해진다.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은 작고 부드럽다. 아담하게 보여 제주도 오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돌산대교 건너에 있는 건물들 외벽에는 노란빛이 더해진다. 바다는 빠른 속도로 어두워진다. 이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의 테두리를 구분하기 어려워지면 돌산대교 야경이 도드라져 보인다. 돌산대교 근처에서 음악을 트는지 옅은 소리의 음악이 바다 건너로부터 들렸다.

청명하게 푸른색부터 주황색 짙은 남색 검은색 그 사이에 있는 명확하게 단어로 지칭하기 어려운 색상까지 같은 장소와 구도로 보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풍경이 달리 보였다. 대자연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맣게 변한 창밖을 배경으로 일기를 쓰면서 문득 드는 생각. 2023년의 여수가 어땠더라? 출장이 목적이라 실내 위주로 다녔던 것 같다. 수족관을 촬영하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고 미디어아트 전시관에서는 예술의 대중화를 생각했다. 여수의 관광 콘텐츠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음을 알아챈 출장이었다.

그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여수에 속한 '경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여행했다. 여수에 경도라는 섬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상대적으로 육지보다 인적이 드문 섬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자유가 느껴졌던 시원한 기분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 전의 여행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수를 만난 때다. 2014년, 기차여행으로 갔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잤던 어린 날의 배낭여행. 진남관 이순신 동상 벽화골목 거북선 오동도까지 알차게 여수 주요 여행지를 섭렵했다. 기억이 흐릿해 찾아보니 몇 곳은 기대보다 조촐해서 실망했지만, 전체적으로 즐길 거리가 다양해서 오길 잘한 것 같다고 블로그에 쓰여 있다. 신나게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2025년의 여수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모습을 한 컷 한 컷 명작을 소장하듯이 오래 기억하고 싶은 곳이다. 조용히 뭔가를 정리하고 또 고이 접고 싶은 상황과 잘 어울리는 곳.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망설임 없이 목적지로 정해도 되는 곳. 바다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곳. 바다 여행지를 추천할 때 여수를 꼭 빠뜨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올해의 여수를 정의 내렸다.

여수의 시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광장에서 숙소로 가는 길, 버스 창밖으로 보였던 바다와 계단식 마을 풍경이 동화책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으로 여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 건지 미리 알려주는 거였나 보다.


여수를 다녀와서 다른 사람들의 여행 후기를 검색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를 가는지 뚜벅이 여행은 어떤 코스로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도앱으로도 높은 별점을 준 식당과 카페는 어떤 후기들을 갖고 있는지 구경하다가 몇 곳은 다음에 가보려고 저장했다. 그렇게 다음 여수 여행과의 거리를 좁혔다.

미래의 여수 여행은 또 다를 거다. 지금은 예상도 할 수 없는 무언가에 감동하며 일기에 그 내용을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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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삶에 용기를 더하는 윤슬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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