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나트랑

by 뚜벅이는 윤슬

* 저의 인생 소설책 <천 개의 파랑>을 제목으로 가져왔습니다. 훌쩍이면서 읽었던 <천 개의 파랑> 책을 자세히 보고 싶다면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또 언제 베트남행 항공권을 손에 쥘 수 있을까, 2025년에 다낭을 다녀온 이후로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곤 했는데 나트랑행 출장이 결정되면서 새로운 베트남 도시를 가보게 됐다. 오호라 나트랑이라니! 다낭을 남들 다 가보고 가더니 다음 뒷북은 나트랑이구나! 나트랑 또한 이미 한국인에게 인기가 많아진 지 오래인 여행지가 된 이제야 가보게 됐다.

해외 출장의 가장 큰 장점은 가보고 싶지만 적극성은 다른 도시 대비 떨어져 자꾸 미루게 되는 도시들을 억지로라도(?) 가게 된다는 거다. 그렇게 가보게 되면 또 예상한 것보다 취향에 잘 맞아서 또는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에 반해서 가장 좋았던 여행지 TOP10 안에 올려지기도 한다.

나트랑은 전자 그리고 후자 두 이유로 TOP10 안에 들어간 상태다.


하루에 2만 보에 가까운 걸음 수를 찍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 여행자에게 '느긋한 여행'이라는 테마만큼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지만, 나트랑에서는 어쩐지 속도가 많이 느렸다. 취재할 때를 제외하면 산책과 감상 또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바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교통 앱인 그랩(Grab) 앱을 열어 택시를 부를 생각을 안 했다. 오직 내 걸음으로 야시장을 구경하고 우연히 발견한 밀크티 가게에서 밀크티를 사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비치클럽에서 사람들이 춤추고 흥겹게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등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빠르게 걷는 운동을 했다.

취재가 늦게 끝나 밤에 숙소로 돌아와도 숙소 건너편에 있는 트란푸해변 거리를 걷는 일은 습관처럼 챙겼다. 나트랑에 있는 시간은 사실상 3박 4일이었는데 그렇게 빨리 푹 빠졌던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다 곁을 매일 걸었다.

아침의 나트랑은 매일이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할 법했다. 건기가 이제 막 시작된 나트랑 하늘은 바다 색깔만큼 파란색이었는데 시력이 0.5쯤 더 높아진 것 같은 선명함과 시원함이 행복 지수를 올렸다. 날씨에 기분이 쉽게 좌지우지되는 편인데 1월 말의 나트랑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반짝반짝 동남아 건기의 햇살을 제대로 받아 빛나고 새하얀 거품이 유독 깨끗하게 보였던 트란푸 해변은 언제나 이상향에 가까운 전경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자 작품 중 청색 물감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를 볼 때면 파란색이 어떻게 지금까지 청명하게 살아있지, 신기했는데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파란색 그대로 파랑이 일어나는 바다의 영원함을 응원했다.

바다만큼 인상적이었던 건 서양인들의 부지런함이었다. 아니면 시차 적응에 실패한 걸까. 아침 7시부터 조깅과 물놀이로 하루를 시작하는 서양인들로 해변이 북적였다. 일찍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게으른 사람인 걸로... 운동복 또는 수영복 차림의 서양인들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했다. 힘차게 움직이는 파도처럼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활동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뛰는 건 좀 그렇고 부지런히 걸어보자. 모래사장을 나오자마자 있는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본격적인 취재 전에 발바닥을 예열했는데 그때 아침 운동의 매력을 처음 느낀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침 운동을 계속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트랑에서부터 시작된 의지가 계속 일렁이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짜 습관이 되기를.


하루는 취재 스케줄이 오전 11시부터 시작이라 다른 날보다 여유로운 오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선택한 건 일정 초반에 우연히 발견한 밀크티 카페에서 밀크티를 사서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 가장 좋아하는 음료인 밀크티를 들고 나트랑 시내를 걷는 동안 자유를 실감했다. 자유시간에 가벼운 컨디션으로 마시고 싶은 음료를 마시면서(그것도 한국의 1/5쯤 되는 가격에)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걷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오늘도 내일도 한국에 돌아가서도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지만 잘 해내서 이런 자유를 자주 영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걸었다. 차가운 밀크티맛은 얼음이 녹아도 비교적 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제대로 된 밀크티였다. 나트랑을 여행하면서 동일한 간판을 몇 차례 봐서 찾아봤는데 중국 밀크티 브랜드라고.... 두 번째로 이 브랜드를 만난다면 그건 중국에서일까? 베트남에서일까? 반드시 두 번째가 있긴 할 것 같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앞서 출장의 최대 장점 중 하나로 예상치 못한 풍경에 반해서 가장 좋은 여행지가 된다고 언급했는데, 나트랑에서는 '포나가르 사원'이 그랬다. 사실 이런 곳이 있는지는 취재처 리스트를 보기 전까지도 몰랐고 리스트에서 사원 이름을 봤을 때도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실제로 봤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여행의 이유를 곱씹게 되는 포나가르 사원의 외형은 고대 유적지만큼이나 고전적인 모습이었는데, 일몰 시간대라 그 광도가 낮아 더욱더 유서 깊게 느껴졌다. 사원 곳곳에 붙어 있는 조명은 주광색 조명을 쐈는데 덕분에 점점 더 어두워지는 배경 속에서 사원은 점점 더 돋보였다. 사원 규모는 다 돌아봐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믐달이 뜬 연보라색 하늘과 풀숲 뒤로 내려다 보이는 강과 다리 그리고 정박해 있는 배까지, 최대한 모든 요소를 카메라에 담느라 발을 바삐 움직이는 여행자의 능력치를 한껏 발휘했다. 그러고는 육성으로 말했다.

"아, 역시 나는 이런 곳이 좋아!"

유적지에 대한 사랑을 나트랑에서 다시 한번 외쳤다.


마음에 물결을 만든 여러 추억 중 예상이 들어맞아 반가웠던 것도 있다. 바로 음식! 나트랑에서 먹은 모든 음식들이 과식을 불렀다. 심지어 맥도날드까지 맛있었으니까. 베트남을 다녀오면 한국에서는 베트남식 전문점 갈 생각을 하기 힘들다. 손해 그 이상의 사기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진한 국물이 중독성 있는 쌀국수와 사이드 메뉴 그 이상으로 실컷 먹어도 몇 천 원 나오지 않는 짜조와 반 쎄오, 한식당 김치와 중식당 단무지처럼 어딜 가나 먹을 수 있는 모닝글로리까지.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는 여행자에게 베트남 여행은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나트랑에서도 식욕 졸부가 됐다. 베트남을 여행할 때마다 만족스러운 이유는 아마 음식이 6할은 차지하지 않을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짐작했다.


이 외에도 잔잔한 바다와 넓은 잎을 가진 나무들이 가득했던 혼미에우의 미니비치, 직접 속도를 조절하는 놀이기구가 소리치게 했던 빈원더스 테마파크, 규모는 소박해도 새하얀 불상은 고개를 높이 들어야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던 롱선사 등 지금까지 참 잘 다녀왔다, 뿌듯하게 하는 여러 개의 파랑이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 기억이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게 응원하고 있다. 나트랑에서부터 시작된 기분 좋은 파도가 또 여러 결의 파도를 만들고 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그 제목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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