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고궁만의 낭만을 찾아서

by 뚜벅이는 윤슬

얼굴이 차게 얼어가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흔들리고 손이 감각을 잃는 결말을 알아도 기꺼이 시작하는 여행이 있다. 고통의 감각 속에서 영감을 얻고 기분을 환기하고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겨울 여행을 좋아한다면 이런 결말에 도파민이 터지는 마니아일 가능성이 높다. 겨울 여행의 낭만, 하면 쉽게 떠올리는 ‘겨울 바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고유명사로 만들어 간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한국의 겨울, 고유의 맛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 ‘고궁’이다. 한국적인 겨울 감성을 만날 수 있는 곳. 쓸쓸함이 결코 우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곳. 서울에 있는 여러 고궁 중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세 곳을 소개한다.




바쁜 도심을 잠시 노이즈 캔슬링, 덕수궁

서울 정동길 한복판, 차도도 인도도 언제나 통행량이 많은 서울시청 일대에 있는 덕수궁은 담벼락의 효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만큼 바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다. 이어폰에 흔히 들어가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닮았다. 직장인들이 많아 평일에도 주말만큼 북적이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차분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소리를 잠재우는 덕수궁은 본래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머물며 궁으로 사용되었고, 고종 시기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격상되어 본격적인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덕수궁의 가장 큰 특징은 한옥과 서양식 건축물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외국 사신 접견 등의 국가 의례를 치르던 중심 건물이었던 중화전과, 고종이 직접 거처했던 함녕전, 러시아인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 정관헌, 영국인 건축가와 조경가가 설계에 참여한 서양식 석조건물 석조전이 한데 모여 있어 풍경이 이색적이다. 여기에 2023년에 복원이 완료되어 일반인에게 개방된 돈덕전은 1902~1903년경 고종 즉위 40주년 예식을 위해 건립된 서양식 2층 건물이다. 현재는 역사 관련 전시들이 진행되는 전시관으로써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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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도 일상이 있다, 창경궁

창경궁은 격식을 갖춘 권위보다 조용하고 일상적인 시간이 머물던 공간의 정취가 흐른다. 조선의 다른 궁궐들이 정치와 통치를 위한 장소로 느껴진다면, 창경궁은 일상적인 전각들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왕이 신하의 인사를 받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명정전은 다른 궁궐의 정전이 남향인 데 비해 유일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정전이지만 거창하거나 위압적이지 않아서 겨울 햇살이 기와지붕 뒤에서 쏟아질 때 아늑한 곳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정전 뒤쪽의 사우당은 왕실 여성들의 거처로 추측되는 곳이다. ‘복을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처럼 궁 안에서도 특히 사적인 감정이 흐르던 공간이다.

창경궁은 그리 크지 않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에 닿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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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인정한 건축적 가치 속으로, 창덕궁

서울의 고궁 중에서 창덕궁은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창덕궁은 서울 5대 고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궁궐이다. 동양 건축이 자연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건물을 배치해 마치 산이 시키는 대로 궁궐을 지은 것 같은 비정형적 구성은 동양적 건축 철학을 보여준다. 창덕궁의 전각 배치는 왕권의 위엄보다는 풍수지리와 유교적 질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왕과 신하, 자연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과, ‘밝게 정사를 베푼다’는 뜻의 선정전, 왕실 여성들이 기거하던 생활공간인 낙선재는 단정하고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창덕궁의 진면목은 궁궐 후면에 자리한 후원(비원)이다.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왕실의 사색 공간이다. 부용지와 부용정, 애련지, 옥류천 등은 각각 다른 분위기와 경관을 형성하며 정원을 거닐 때마다 마치 연속적인 장면이 펼쳐지듯 움직이는 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겨울의 후원은 잎이 모두 지면서 건축의 선과 조형이 그대로 드러나 그 구조적 아름다움과 여백의 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가장 잘 녹아드는 후원은 사진작가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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