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이 편했다

애쓰기보다 불편함을 선택했다

by LYR

이제 고3이 되는 딸과 2주간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필요한 말만 짧게 짧게 한다.


작년, 기말고사를 막 마친 딸은 과탐(과학탐구) 학원을 바로 등록하고 시험 끝난 다음날부터 갔다.

딸은 시험 끝나고 놀지도 못하고 바로 학원을 가는 게 당연히 싫어서 투덜댔다.


사실 기말 전부터 학원 설명회를 줄기차게 다닌 나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아이에게 공부 푸시를 했다.


아이가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섰다.

스스로 하면 좋겠지만

시간을 갖고 기다려주고 싶지만

고3이 되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던가?

이건 아이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의 경제와

나의 노후와도 관련이 있기에 안 나설 수가 없었다.


아이는 당연히 불만히 많았다.

자기도 기말 끝난 그 주에는 친구들과 놀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학원 선생님과 내가 학원 시간을 정해서 '아차' 싶긴 했다.


엄마에게 계속 짜증을 내며 투덜투덜 과학학원 갔다 온 아이는

뜬금없이 사탐(사회탐구) 학원을 다니겠다고 등록해 달라고 했다.


이 소중한 황금 같은 겨울 방학 때 갑자기 사탐을?


물론 보내 줄 수 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은 잔소리와 강압으로 듣던 아이가

과학 선생님이 사탐도 다니라고 했다고

단번에 사탐 학원을 다녀야겠다고 하니 화가 날 수밖에.

누르면 다 나오는 자판기인가 엄마가?


딸아이는 이번 수능에서 사탐런을 하기로 결정했다.

한 달 전 나에게 사탐은 3학년 1학기 기말 끝나고 해도 된다고 국, 수에 집중할 거니깐

사탐으로 갈아탄다고 나를 설득했었다.


'사탐런'은 최근 수능 입시 전략에서 주목받는 용어로, 기존 과학탐구(과탐)를 선택하던 자연계열 학생들이 사회탐구(사탐)로 전환하여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국, 영, 수도 지금 급한데

누구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아이 대신

3~4시간 되는 학원 설명회를 다니며 아이에게 맞는 학원과 수업 스타일을 찾으려고 애썼다.

"아침 수업은 싫다."

"대형은 싫다."

"남자 선생님은 싫다."


'그럼 네가 골라서 다니든가?'

'아님 다니지 말든가?'



2024년 한 해 애썼다. 내 딸.

아픈데 공부하느라고.

하지만 엄마도 애썼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늘 너를 지켜보고

네가 불편하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항상 애썼어.


너도 아픔을 견디기 위해 애쓴 만큼 엄마도 순간순간 고민하고

너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했어.


지금 아프지 않을 때 좀 더 입시 준비를 해줬으면 해서 엄마 마음은 조급해.

엄마는 너를 성인이 될 때 최대한 자립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

엄마가 늘 너의 옆에 있을 수 없으니깐

넌 조금은 아픈 아이니깐.






12월은 한해의 마지막 달이기도 해서 생각도 많아지고

그 와중에 나라도 사건, 사고가 많아 불안하고

아이는 이제 고3이 되고.

40대 후반의 고민도 밀려와서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너그럽게 대할 수가 없었고

소리 지르며 다투다가 말도 하기 싫어졌다.


같은 거 여러 번 먹는 거 싫어해서

매일매일 아침마다 아이가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고

밥, 과일(사과, 귤, 바나나, 키위...), 빵, 요거트, 만두, 계란(삶은 거, 구운 거),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등등

먹고 싶은 거 준비해서 한입이라도 먹이고 보냈다.


병원을 갔다 안 갔다, 약을 먹었다 안 먹었다 하면서

감기가 4주가 넘어도 안 나아서 신경이 쓰였는데

다시 심해진 것을 엄마 탓으로 돌리는 딸에게 화가 났지만 참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학원 문제로 터져버렸다.

난 언성을 높이고 아이도 똑같이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했다.

져주고 싶지 않았다.

냉정하게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마음속의 내 말들을 쏟아냈다.


아이와 냉전 2주.

그동안 아이와 잘 지내려고 애쓰기보다 서로 말하지 않는 불편함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히려 편했다.


'더 챙겨주고,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부지런해야 했던 엄마가

지금 약간 피곤해'


예전에는 누군가와 말을 하지 않는 게 너무 힘들고 그 불편함을 못 참았다.

불편함이 힘들어서 보기 싫은 사람, 말하기 싫은 사람, 미운 사람에게

애써 먼저 말 걸고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딸과 2주 가까이 말을 안 할 때

남편이 그 중간 역할을 했다.

아이 학원을 아빠가 라이딩했고

내가 알아야 할 정보들을 아이에게 전달받아 나에게 알려줬다.


최소한의 엄마 역할은 해야 하니 덤덤하게

아이가 먹을 만한 반찬과 간식거리들을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두고

가끔 머리카락 투성인 아이의 방도 밀어주었다.


딸이랑 말을 하지 않았던 건

말을 안 해도 불편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엄마로서의 역할을 잠시 잠깐만이라도 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 말 안 해도 엄마가 아쉬울 건 없고

아프다고 다 맞춰주고 들어줄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도 싶었다.


잠깐의 쉼이고 시위이기도 했다.


한 해가 시작됐고 작년 연말처럼 연초에도 여전히 생각이 많다.

2025년은 또 어떤 한 해가 될까?



이젠 다시 시간이 왔다.

딸아이에게 조금씩 애써야 할 시간.

딸아이가 편하게 엄마를 찾을 수 있고

엄마에게 조잘조잘 대며 수다 떨 수 있도록 마음을 열 시간.


아직도 아이가 살짝 밉다.

아이도 엄마에게 여전히 차갑다.


하지만 은근 유머가 있는

그래서 엄마를 웃겨주는 그리고 웃는 엄마를 보고

자기도 웃는 아이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다.


딸아이를 위해 내일 뭘 해 줄까?

자기 전에 냉동실의 소고기를 꺼내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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