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잠 설치며 공부했던 MBA, 위기의 순간 나를 구하다
[5년 전 클로징 다음 날]
M&A가 마무리된 지 어느덧 5년이 흘렀다. 폭풍 같던 시간은 지나가고, 이제는 제법 단단해진 시스템 위에서 하루를 보낸다.
문득 과거의 오늘이 궁금해져, 낡은 업무 수첩을 펼쳐 들었다. 5년 전, 클로징 다음 날 비로소 진짜 전쟁이 시작된 날의 기록이었다.
그날 아침, 한 통의 메일과 함께 PMI(Post Merger Integration, 인수 후 통합) 일정이 하달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통합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사의 조직, 시스템, 재무 등 경영 전반의 체질을 새롭게 동기화하는 방대한 과정이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8일간의 숨 막히는 실사 일정이 빽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IT팀, 법무·공정문화 파트, IP팀, 경영기획팀, 채권관리팀, HR팀, 내부회계관리팀, 일반법무팀. 각 부서별 미팅만 2~3시간씩, 참석 인원도 대기업 측에서만 2명에서 4명씩 투입되는 대규모 일정이었다.
나는 즉시 짧은 답장을 보냈다.
"기존 업무도 많으실 텐데 감사드립니다. 일정 맞추겠습니다."
사실 그 답장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업무는 말로 설명이 부족했다. 밀려드는 기존 현업은 현업대로 쳐내야 했고, 8개 부서의 PMI 대응은 사실상 나 혼자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했지만, M&A 밸류에이션부터 모든 실무를 내 손으로 직접 챙겨 왔기에 엑시트 후 잔여 지분을 보유한 주주 임원들도, 그리고 나 스스로도 나를 유일한 '적임자'라 여겼다.
그래서 감히 일정을 늦춰달라는 조정 요청조차 하지 못했다. 일정을 늦춰도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8개 부서의 PMI 실사에 대응하고, 끝없이 쏟아지는 사전·사후 요청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본래의 내 업무는 저녁과 새벽, 주말을 온전히 쏟아부어 처리했다.
그 압도적인 업무량을 나는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책임감이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무모함이었음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그 지난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우리 회사를 방문했던 대기업 팀장님들과 매니저님들의 태도 덕분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본연의 업무도 많을 텐데, 빡빡한 일정표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단 한 번도 고압적이거나 무례하지 않았다. 늘 정중했고, 실무자의 고충을 깊이 이해하며 배려해 주었다.
나중에 넌지시 문의해 보았다.
"PMI 지원 나오시면 추가 수당 받나요?"
"아니요!"
그들의 짧고 명쾌한 대답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보상 체계와 상관없이, 그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철저한 프로의식을 보여 주었다. 그때 마주했던 이름들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사무실 안에서는 '명함 로고가 언제 바뀌느냐 '는 들뜬 목소리가 오갔다. 나는 그 대화에 차마 섞일 수 없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지체 없이 상장사인 모기업 연결결산 담당자의 요청이 당도했다.
"1분기 연결 준비해야 하니 방문 일정을 잡아주십시오."
대기업 기준에 맞는 연결 재무제표 작성은 PMI 일정과는 또 다른 거대한 파도였다. 1분기 결산 기한을 앞두었기에, 이 작업이 조직의 최우선 순위임을 직감했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텅 빈 사무실에서 끝도 없는 자료들과 씨름하던 그날, 문득 잊고 지냈던 과거의 한 조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몇 년 전, 나는 퇴근 후와 주말을 온전히 반납한 채, 2년 동안 MBA 과정을 이수했다.
그저 '언젠가 나의 경영 실무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순수한 갈증 하나로 사비와 개인 시간을 온전히 투입하여 스스로 선택한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밤잠을 설치며 공부했던 그 지독한 시간들이 언제, 어디서 쓰일지. 그런데 M&A 클로징 직후 쏟아지는 8개 부서의 날카로운 질문과 거대한 대기업의 연결결산 요구 속에서, 나는 놀라운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그들이 던지는 재무의 언어가 들렸고, 그들이 요구하는 거대한 조직과 기업 구조의 밑그림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실 한구석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기업의 재무와 조직, 구조를 이해하려 발버둥 쳤던 그 치열했던 시간들. 조별 발표를 하고, 원우들의 날카로운 피드백에 뼈아프게 깨어지며 성장했던 그 시간들. 그 모든 배움의 조각들이 마침내 하나로 맞춰지며, 홀로 벼랑 끝에 서 있던 나를 조용히, 그러나 아주 강력하게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미래를 위해 묵묵히 투자했던 시간은 결코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예상하지 못한 위기의 순간에,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가장 견고한 구명조끼를 건네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 새벽, 텅 빈 사무실에서 나를 버티게 한 건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었다. 몇 년 전의 내가, 밤잠을 설치며 쌓아둔 것들이 조용히 와서 나를 붙들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구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