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 리더가 기타 비상무이사라는 단어에 무너졌던

나의 세계의 익숙한 단어에 갇혀,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

by O Dan o

M&A 계약 종결을 앞둔 어느 해 2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달이었다. 거래 종결의 필수 선행 조건(Closing Condition)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야말로 동서남북으로 날아다녔다.


종결 열흘 전쯤, 폭풍 같은 일정 속에서 정기주주총회를 치렀고, 이사와 감사 선임 안건이 승인된 의사록을 공증받자마자 즉시 제출했다.


그때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법무 전문가도, 자금팀도, 나 자신도. 우리는 각자가 경험하는 세계 속의 익숙한 단어에 침잠해 있었다.


나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사외이사'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있었다. 상대측이 제시한 '기타 비상무이사'라는 용어의 차이를 내 안의 관성으로 덮어버린 채, 그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균열을 알아채지 못했다.


계약이 종결되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일이 쏟아졌지만, 모든 것은 나의 통제권 안에서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폭풍 같은 업무마저 익숙한 루틴으로 흐르는, 평온한 일주일이었다.


그 평온이 깨진 건 종결 일주일 후이었다.

메일함에 내용도 없이 첨부파일만 덩그러니 놓인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곧이어 담당 매니저의 전화가 따랐다.


“첨부파일 보세요. 사외이사가 아니고, ‘기타 비상무이사’로 표기해야 합니다.”

“기타… 비상무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열었다. M&A 초기에 상대측에서 보냈던 최초의 제안서였다.


거기에는 분명히 ‘기타 비상무이사’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 문서를 보았지만 보지 못했다. 평소 접하지 않던 생소한 용어였기에, 내 안의 관성이 익숙한 단어로 덮써 버린 것이다.


꼼꼼히 챙겼다고 자부했던 서류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있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M&A 효력에 치명적일 수 있는 법적 성격의 오류. 이미 종결된 계약 서류를 바로잡기 위해 임시주주총회를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 처참할 만큼 부끄러웠다.


등기이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년 넘게 관리 전문가로 살아온 내가 단어 하나를 간과해 재작업을 요청해야 했던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통화였다. 다행히 모든 것이 수습되었지만 마음속엔 깊은 흉터가 남았다. 새로운 관계의 첫인상을 망쳤다는 자책감에 완벽을 기하고자 했던 나 자신을 스스로 가장 가혹하게 질책했던 밤이었다.


사실 기타 비상무이사란 회사에 상근 하지 않으나 사외이사의 엄격한 독립성 요건에서는 자유로운 지위를 말한다. 주로 대기업 계열사 임원이 자회사 이사회에 참여할 때 선임되는 유형이다.


상법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여 등기해야 하는 이 법적 용어의 무게를, 나는 그날의 실책을 통해 비로소 뼈저리게 체감했다. 성장은 왜 이토록 혹독한 임계점을 넘어서야만, 그리고 뼈아픈 자책을 동반해야만 찾아오는 것일까.


이제는 안다. 성장은 안락한 의자가 아니라, 치열한 성장통 끝에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을. 공부만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던 영역이 있었다.


"경험한 만큼만 보인다"는 격언은 진실이었다.


최초의 제안서에 적혀 있던 그 글자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은, 내가 그 단어가 내포한 법적 책임과 실무적 무게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혹독했던 실수는 나를 바꾸어 놓았다. 이후 5년 동안 나는 정기 이사회를 단순한 법적 형식의 장이 아닌, 진정한 공유와 고민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사회 운영의 내실을 인정받는 지금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그날의 처참했던 실수를 자양분 삼아 만들어졌다.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때로는 한계 앞에서 멈춰 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믿는다. 그 아픈 실수가 훗날 나의 시야를 넓혀줄 축복이 될 것임을. 그날이 실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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