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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이 Jan 16. 2024

자연에게

엉킨 고백ㅡ2, 나는 자연으로부터 왔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회색 눈으로 너희를 처음 마주했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있었고, 깨어나지 않고 싶었다. 아프지 않았고, 배고프지 않았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의 상태에 있었다. 


 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자고 싶었다


 사랑할 수 없는 시간. 그런 시간 속에 살며 어느 날 그렇게 좋아하던 너희들도 텅 빈 눈으로 보고야 말았어. 너희들은 그대로 있는데, 나는 왜 자꾸만 자고 싶은 걸까. 너희들은 내가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인데, 나는 왜 그런 너희들을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그대로 존재하는데 나는 왜 사랑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멈춰 있는 걸까. 그때서야 나는 내가 지금 많이 아프구나,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응 그렇구나. 그렇네. 그러고는 놀란 기색도 없이 계속해서 그 죽어있는 눈으로 너희를 아주 천천히 보는데, 나는 앞으로도 무감각하게 너희들을 보게 될까 봐 겁이 나면서도 너희들에게 눈을 뗄 수 없었어. 왜 그랬을까. 너희가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절실하게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던 걸까. 아무런 감정의 요동이 없어 편안했던 것은 기억해. 그래서인지. 내일이면 당장 사라질 것을 몸에 깊이 저장하려는 듯이 나는 며칠 동안 그리고 긴 시간에 걸쳐 죽어있는 눈으로 너희들을 그저 꼼꼼하게 보는 행위만 했는데, 나는 그제야 너희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게 된 거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너희가 존재하는 그대로 너희를 볼 수 있게 된 거야. 


 이상하지. 그대로 보게 됐을 뿐인데 나는 왜 눈물이 났을까. 단지 그뿐인데 죽어있던 마음이 일렁였을까. 일렁이는 것에 저항할 힘도 없어 스스로의 의지인지 아닌지 구별하지도 못하는 채 나는 너희 앞에서 울기만 하는데 그 순간에도 너희들은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계속해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지. 무서우리만큼 정직하게. 내가 너희를 보며 호들갑을 떨고, 행복해했던 모습을 보듯이 너희는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에도 쏟아낼 때에도 나를 파괴하고 있을 때에도 나를 그대로 보고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어. 


 나는, 존재하는구나

 나는 너희 앞에서 그대로 존재하는구나


 나는 너희가 필요하구나.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나의 자연아. 

 허허벌판에 꽃을 피워준 나의 자연아. 


 너희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무작정 제주로 떠나고 하루 종일 너희의 품 안에서 걸었지. 수진언니는 매일을 사람들에게 졌다고 했지만, 나는 매일을 너희와 함께하며 나에게 졌던 것 같아. 제주에 머물렀을 때 낯선 곳 어디에서도 낯선 사람들 틈에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망설임 없이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너희 덕분이 아닐까. 


 너희는 나를 그대로 봐줬고, 너희 앞에서 나 역시 구름 하나 끼지 않은 눈으로 너희를 그대로 볼 수 있었어. 나를 그대로 두는 너희 앞에서 나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고 너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존중했고, 나는 처음으로 어떠한 타자를 그대로 마주하고 존중한 거야. 


 존중. 그래 존중.


 있잖아, 나는 답을 찾고 싶어 사람도 많이 찾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너희한테 배운 것만큼 무언가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어.


 알오름아. 

내가 실컷 인사할 수 있게 도와준 알오름아. 

나는 너의 나무들에 둘러 쌓여 내 것을 내려놓았던

너의 품에 있던 그 순간이 참 애틋하다. 


 자연아. 

나는 오늘도 많은 것들과 인사를 실패하면서

어린아이로 남아

무언가를 피해 너희에게 평생 숨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해

아, 정말로 너희에게만 안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숨지 않을게

너희가 가르쳐준 대로 세상에 나와서 사랑할게


 시간이 걸려도

마음을 열고 세상을 만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계속 사랑하며 살아갈게


 너희에게, 그리고 너희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매일을 지고, 인사하고, 마주하고,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그러니까 존중하면서. 사랑하면서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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