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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l Sep 25. 2023

한국 여권을 갖고 스위스독어를 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외국어들과 나의 오랜 동거_01

나는 현재 내가 사는 이 나라, 스위스 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서른 중반을 넘겨 정착한 이 나라에서의 일차 과제는 언어였다. 지난날 나는 많은 언어를 경험했다. 그냥 경험했다. 감히 이 언어들로 소통 가능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냥 경험했다. 영어야 밥벌이의 영역이니 제외하고 일어, 이탈리아어, 태국어, 힌디어, 스웨덴어 등등…

 

나는 대충 이 언어들의 생성 과정이나 조합, 한글과의 차이 등을 훑어보고 간단히 기뻐했고 다음 언어로 넘어갔다. 나의 미천한 지구력으로는 언어습득의 단계까지 가기 어려웠고, 나는 그 지구력의 부족을 시간의 부족이라 여기며, 언어란 시간만 투자하면 습득되어지는 기술이라 치부했다. 그래서 나의 이 대륙간 이주는 언어적 한계라는 가장 큰 장애를 가뿐히 무시하고 별 망설임 없이 이루어졌다. 나의 언어에 대한 무지는 그러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시간만 투자하면 습득되어질 독일어를 나는 열심히 했다. 3개월, 6개월, 9개월…하지만 나의 생각만큼 독일어가 쉬 늘지는 않았다. 다행히 핑곗거리는 있었다. 나는 이곳 공용어인 독일어를 배우지만 내 주변에서 들리는 언어는 다 스위스독어였다. 그렇다. 나는 스위스 지방 소도시로 겁 없이 이주한 것이다. 독일인도 2년 정도는 스위스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들린다는 그 스위스독어. 복병이었다. 어떤 나미비아인이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제주도 깡 시골에 들어가 할머니들의 제주도 사투리 속에서 입 대신 눈만 껌뻑거리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지구력은 없어도 눈치는 빨라 언어가 들리면 그 상황과 조합해 그 문장의 적절한 사용처를 알아내고, 그 성취감으로 학습의 동기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나보다도 스위스독어를 더 잘 알아듣는 이 동네 개들에게 주어버렸다.

 

독일어를 아무리 해도 정작 알아들어야 할 스위스독어는 안 들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독일어가 늘어야 스위스독어도 들리는 것이었다. 난 죽을 때까지 써야 할 나의 지구력을 다 소진했고 점점 이 들리지 않는 상황에 익숙해졌다. 들리지 않는 상황은 익숙하지만 들리지 않아서 창피하고 민망한 많은 순간들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난 발화를 할 수 있는 모든 동물 들을 멀리했다. 자괴감마저도 모두 소진되었다.  

 

스위스인 모두가 한다는 그 영어를 여기 주민들은 외국에 나가거나 최소한 영어를 하게 생긴 인종과의 대화에서만 사용하는 듯했다. 독일어 기초반을 등록하러 간 내게 어학원 직원마저도 독일어를 사용을 강요했다. 여행으로 방문했던 스위스 대도시에서 관광객으로 받았던 환대를 기대하고 기세 좋게 굳모닝에브리원을 외치던 나는 그들의 싸늘함에 어눌한 독일어마저도 내뱉지 못했다. 비교하자면 홍대나 신사동에 있었으면 당하지 않았을 고통을 나는 안동 어디쯤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행스러웠던 점이라면 이 지방 소도시에서도 간고등어는 주문해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 우울한 간고등어를 구워 먹으며 살아가는 중에 딸아이도 태어났다. 이제껏 맛본 적 없는 진정한 육체노동의 결과로 아이는 뒤집고, 앉고, 걷고, 옹알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복병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이의 사회적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 어미 된 자는 발화하는 동물들 틈에서 발화를 하여야 했다. 엄마가 발화하고 창피해하고, 발화하고 민망해하는 사이 아이는 유아원, 유치원을 거쳐 학교에 가게 되었다.

 

우리는  번의 이사를 거쳐 독일어를 쓰면 좋지만 영어를 써도 봐줄게의 현재 이 도시로 이사를 하였다. 몇 달 후면 이곳에서의 나의 체류는 10년을 꽉 채우게 된다. 나의 독일어는 여전히 "나는 당신의 환대에 감사해합니다. 후훗"이라고 말하는 수준을 크게 못 벗어났고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언어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니라며 더 이상의 자기 합리화는 불가능한, 강산도 변하는 그런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의사소통의 욕구 따위는 꼬깃꼬깃 접어서 저 아름다운 라인강에 집어던진 지 오래전이고, 학습의 시간대비 효능 같은 걸 따지는 것 또한 불온했다. 그냥 언어습득의 사각지대 같은데 갇혀서 언어의 유희나 교양 있는 언어의 구사는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죽기 전에 독일어로 된 책 한 권은 쌍욕 하지 않으며 읽어내고 싶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나는 딸아이의 정규교육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이론은 간단했다. 여기서 초등 정규교육을 받은 청소년들만큼의 문해력만 갖자! 최소한 국어 교과서는 아이의 진도에 맞춰 읽어 나가자였다. 그렇다고 아이의 옆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참관할 정도의 또라이는 아니니 대신 아이의 숙제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긋지긋한 독일어이지만 나의 무능 또한 지긋지긋 한지라...

등교 첫날.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학교에 갔다. 나는 아이의 학습보다 내 학습에 더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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