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정착한 지 2년이 넘어가던 시점에 나는 돌돌 말린 구운 오징어다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 후 난 산업디자인을 하겠다고 디자인 전문 대학원에 들어갔다. 20년도 더 된 일이다. 서류가 통과되고 어찌어찌 인터뷰도 통과해 난 대학원생이 되었다. 첫날 프랑스인 교수의 영어 수업을 난 진심을 다해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멍 한 머릿속으로 영어 인터뷰에서 날 통과시킨 그 뚱뚱한 미국 남자를 저주하고 있었다. 내 학부 전공은 일어일문학이었다. 진짜 스미마생 했다.
1학기가 꾸역꾸역 마무리되고 난 손톱 밑에 페인트도 마르기 전에 영국으로 날아갔다. 이번 여름방학에 이 영어를 어찌하지 못하면 3년 뒤 석사학위대신 수료의 영광을 마주할게 뻔했다. 난 잡(job)을 좁(job)으로 워러(water)를 워오터(water)로 교정받으며 허겁지겁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2학기. 학교에 잠시 방문한 영국디자이너의 세미나에서 나는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볼 기회가 있을지 물었다. 오~~ 다른 사람도 다 있는 수업시간에 막 would도 써가며 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영어를 알아듣고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가방에서 꺼냈다. 갑자기 그녀의 뒤로 성녀들에게서나 나타난다는 그 후광 같은 게 보였다. 2개월 현지 어학연수의 쾌거였다.
난 20년 전의 이 개인적 성과를 토대로 스위스에서의 미래를 설계했었다. 기본적 대화는 6개월, 전문적 대화는 1년을 목표로 잡았었다. 스위스에 정착한 지 2년이 지나갈 무렵 한국에서 가져온 수첩을 발견해 들춰보니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위풍당당하게 적었던 황당한 계획이었다. 그 수첩 옆에는 여전히 너덜너덜해진 기초 독일어 책이 펼쳐져 있었다. 안일하게 독일어가 안되면 영어로 하지 뭐의 정신상태로 이곳에 온 나에게 물었다. 누가 너에게 스위스사람들 다 영어도 잘한다 그러던?
사실 그들이 영어를 잘하는지 못 하는지 그들과 별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은 나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일단 나랑은 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스위스 그러면 세계 각처에서 도착한 어마어마한 관광객이 이 산맥 저 산맥에 넘실거리고, 한 손에는 초콜릿 다른 한 손에는 치즈를 들고 온화한 미소로 이들을 맞이하는 현지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아니라면 국제기구가 동사무소처럼 즐비하고, 정말로 김정은의 계좌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알 것 같은 은행 직원이 길거리에서 샌드위치를 베어무는 장면이 연상된다. 당연히 그들은 영어를 잘하고 나는 큰 언어의 장벽 없이 이 사회에 적응하리라 생각했었다. 나는 스위스를 퉁쳐서 이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잠시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스웨덴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거지가 내게 와 스웨덴어로 뭐라 뭐라 한다. 그에게 난 스웨덴어를 못하오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 그가 다시 이야기했다. "Do you have one krona?". 나에게는 길거리 거지도 영어로 구걸을 하는 나라가 영어를 잘하는 나라였다. 영어만 들리면 눈에서 레이저광선을 뿜는 나라가 프랑스 말고도 여기 또 있었던 것이다.
이주 초기 난 스스럼없이 영어를 시도했다. 그들도 스스럼없이 내게 독일어 사용을 주장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주장이 나의 독일어 향상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항상 나를 가르쳤다. 이상했다. 영어 원어민들이 영어를 시도하면 그들은 아주 부끄러워하며 더듬더듬 영어를 내뱉었다. 함부로 당당하게 독일어 사용을 강요하지 않았다. 분했지만 받아들였다. 한국이라고 안 그렇겠나 싶었다. 내가 어려 보여 그런 거려니 했다. 남편은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리히에 있는 한 동년배 한국여성을 시동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5년 먼저 취리히에 정착해 취리히에서만 5년을 살고 있었다. 시골에 처박혀 호시탐탐 취리히로 나갈 궁리를 하던 나는 나의 오징어 옷을 벗어던지고 나풀나풀 날아 취리히 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에게 그녀가 "One moment, please!"라고 이야기했다. 난 긴장했다. 저 웨이터는 당연히 "뭐라고? 독일어로 해 주겠니?"라고 눈도 안 마주치고 대답할 테니. 근데 그 웨이터가 인상 좋게 웃으면서 그냥 돌아갔다. "Oh, sure. Take your time."이라고 대답까지 해주면서. 우리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고작 40분이었다.
난 울분을 참아내며 그녀에게 나의 지방 소도시 생활에 대해 토로했다. 그녀는 취리히에서는 영어사용이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내가 처음 터를 잡았던 그 마을이 유독 보수적이라는 사실을 2년 전 지금 사는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차피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이 헬베티족과 같이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독일어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독일어가 더럽게 어려운 언어인지라 어지간히 공부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말하기가 쉽지 않고 그 덕에 외국인이 독일어를 잘하면 현지인들이 아주 반가워한다는 남편의 근거 없는 이론을 나는 믿었다. 뻥이었다. 스위스독어를 하는 그들에게 내가 하는 표준독일어는 학교의 언어였다. 정확히 말하고 써야 하며 끊임없이 교정을 받던 언어이다. 이곳에서는 표준독일어를 윗독일어(Hochdeutsch)라고 한다. 영어 사용을 포기하고 수줍게 이 윗독일어를 더듬거리며 쓰는 내 앞에서 그들은 나보다도 이 윗독일어를 말하기 부끄러워했다. 대구남자에게 서울말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반 미치광이 상태가 되어서 독일어 공부를 이어나갔다. 여차하면 태국에 있는 동생네로 다시 이민을 갈 생각이었다. 꼭 반드시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이 스위스연방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스위스의 공용어는 무슨 선물세트도 아닌 것이 4종이다. 내 글을 읽는 이들은 이 4종에 영어를 끼워 넣는 실수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스위스연방 외교부(EDA)의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2.6%가 독일어 또는 스위스독어, 22.9%가 프랑스어, 8.2%가 이탈리아어, 0.5%가 로만어를 사용한다. 다 합하면 94.2%이다. 100%가 아닌 이유는 스위스의 이 공용어 4종 중 그 어느 언어도 사용하지 않는 강철멘탈 인구가 5.8%나 되기 때문이다. 저 5.8%는 공용어 따위는 필요 없이 해외에서 큰돈 싸들고 들어온 초갑부 외국인들이거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대도시 대기업에서 별 불편 없이 사는 이들일 것이다. 내가 감히 저 5.8%에 들려했던 것이었다. 쯧쯧. 영어는 포르투갈어와 함께 스위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국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국어이기는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나에게는 쓰지 않던 언어였다. 포르투갈어는 스위스 노동자계급의 상당수가 포르투갈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명 중 여섯 명이 넘게 쓰는 언어가 독일어 또는 스위스독어라고 나와있다. 그렇다. 독일어에서 분리되어 명시될 만큼 스위스독어는 독어와 다른 언어이다. 알레만 방언이라고 불리는 이 스위스독어는 자기들끼리도 의사소통이 힘들 만큼 심한 사투리가 많아 사투리를 번역해 주는 앱이 존재할 정도이다. 표준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스위스의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과 여러 작은 중세 도시들이 연합해 만들어진 연방국가라는 정치적 특성을 고려하면 또 그렇게 이상할 일 은 아니다.
다음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본토어보다 많이 느려서 종종 놀림거리가 된다고 들었는데, 느린 말을 비웃는다는 건 최소한 본토인도 알아는 듣는다는 이야기이고, 공식적으로 스위스불어나 스위스이탈리아어라 불리지 않는 걸 보니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로만어가 남았다. 이곳에서는 레토로마니쉬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강원도쯤에 해당하는 그라우뷴덴이라는 칸톤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라틴어에 가까우며 남편의 외할아버지가 이곳 출신으로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몇몇 단어에 이 로만어가 남아있다. 예를 들면 딸아이는 증조할머니를 바사타(Basatta), 할머니를 따타(Tatta), 할아버지를 따트(Tat)라고 부르고 나도 남편의 할머니를 이 로만어로 부르고 있다. 할머니는 나를 만나면 자신이 로만어를 쓰는 시댁에서 초반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종종 이야기하시며 타국에서의 나의 고충을 묻고는 하신다. 이 로만어의 지역을 우리는 자주 방문하는데 지명이나 도로명이 읽기 힘들어지면 나는 아! 로만어의 지역으로 들어왔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스위스에 대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스위스인들이 이 4개 언어를 모두 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틀렸다. 그렇지 않다. 10년을 체류하며 이 4개 언어를 모두 하는 인간은 언어학자였던 나의 예전 상사 딱 한 명뿐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베른, 프리부어그, 발레, 그라우뷴덴 이 4개의 칸톤(우리의 도에 해당한다.)과 비엔 1개의 도시에서만 다국어를 사용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뭐 중요한 정보일까 싶지만 스위스가 4개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공용어가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남편은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했다. 언젠가 우리는 프랑스어권 스위스로 놀러 갔다.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그 도시 호텔 프런트에서 프랑스어를 시도하던 남편은 결국 영어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교사이신 시아버지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하시고 또한 교사이신 시어머니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를 하신다. 교사라는 직업적 특성상 언어를 많이 하시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 누구도 로만어로 대화하지 못한다. 스위스 언어의 특징이 그들의 공용어가 4가지나 된다는데 있기도 하겠지만여러 인종이 모여 살며 다양한 모국어를 토대로 습득한 같은 듯 들리지만 또 참 제각각인 언어라는 점도 그 특징이라고 보인다.
얼마나 제각각인지 우리 동네를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우리 아랫집 아저씨는 이탈리아 혈통으로 스위스에서 자란 스위스 국적자로 이탈리아말도 한다. 아줌마는 러시아사람으로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비자를 받으러 다니는 게 진절머리 난다며 얼마 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잠시 우리나라 외교부에 감사를 전한다.) 그 아랫집 아줌마는 독일 사람이다. 평범하다. 옆집으로 건너가 보자. 아저씨는 스위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탈리아 국적자로 이탈리아어는 못한다. -스위스는 양쪽 부모가 모두 외국인인 경우 그 자녀들에게여기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시민권을 주지는 않는다. 외국인 부모의 국적을 따라가거나 나중에 취득절차를 따로 밟아야 한다.- 아저씨의 집에는 덴마크인 여자 친구가 살고 있다. 또 그 뒷집으로 가보자. 스위스여자가 아르헨티나 남자와 살고 있다. 딱 한 집만 더 건너가 보자. 스위스 아저씨가 독일 아줌마랑 살고 있다. 하지만 아저씨와 딸은 봉슝봉슝 벨기에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아저씨의 어머니가 벨기에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 동네 가정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위에 언급된 언어 외에도 헝가리어, 마다가스카르어, 에리트리아어, 스리랑카어, 폴란드어, 이란어 등이 있다.
전체 국민의 24.3%가 공용어 4종이 아닌 다른 언어를 집 안에서 주 언어로 사용한다고 통계에 나와있다. 예를 들면 어느 필리핀 가족이 집에서 100% 따갈로어를 사용하면 이 24.3%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 집 공식 언어는 표준독일어라 이 통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스위스의 15세 이상 인구의 2/3 이상이 정기적으로 2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집에서 표준독일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내가 여기 해당되는 것이다.
뭔가 되게 국제적인 동네 같지만 우리 동네는 스위스 현지인의 비중이 아주 높은 동네 중 하나이다. 중세시대부터 상업이 크게 발달한 관광도시로 대대손손 이 동네에 뿌리박고 사는 가족이 많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자주 사용되는 다른 언어인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알바니아어 사용자가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주로 대도시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벽화가 많은 우리 동네. 이 건물은 귀신출몰로 모든 임대인이 다 나간 상태다. 주인이 작년에 퇴마를 한다고 했는데, 했는지 안 했는지 여전히 비어있다. 임대 하실 분 연락 바람.
다국어 구사 능력은 스위스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다국어의 사용은 스위스의 살아있는 정체성이라고 스위스 연방 외무부 홈페이지에 나와있다. 저 다국어 구사능력이 없어서 나는 스위스 정체성에 아직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스위스 정체성을 반은 가지고 태어난 나의 딸은 나처럼 언어로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한국어 어순에 단어는 죄다 독일어 단어를 끼워 넣어 이야기하는 아이의 문장을 나는 다시 한국어로 고쳐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