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남편의 식구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였다. 그녀는 무척 쑥스러워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쑥스러움은 무척 오래갔고 서로 간에 별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 당시 그녀는 영어로 이야기하는걸 무척이나 어색해했고, 난 독일어라는 언어 자체가 어색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같이 산책을 나가자며 찾아오고, 같이 차를 마시자며 찾아왔다. 그녀는 저녁으로 콜드디너(빵, 살라미, 계란, 치즈 등 특별한 조리가 필요하지 않은 음식들로 먹는 저녁식사.)를 먹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큰오빠가 긴 출장을 떠난 날은 나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린 정말 가족처럼 별 다른 대화 없이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 배시시 웃고 다시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침묵이 더 길었던 시간들을 함께 쌓아갔고 그녀는 몇 년 후 오랜 남자친구와 결혼하였다. 나와 남편은 여행 바우처를 결혼선물로 전달했다. 그 바우처로 여행을 떠난 그들이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내왔다.
남편이 내가 가져온 우편물 속에서 엽서를 발견하고는 뒷면 주소를 보더니 깔깔대고 웃는다.정확한 주소를 몰랐던 그들은 주소대신'뷜러가의 원형 교차로에 있는 전통가옥에'라고 적었고, 그 엽서가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한 것이다.
아... 이거 너무 정겹잖아.
다행히 그 교차로에는 스위스 전통가옥 샬레(Chalet)가 딱 우리 집 한채 밖에 없었다.
혼자 정겨워하며 요리조리 엽서를 돌려보던 내게 남편이 예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도 어릴 적 정확한 주소를 모르면ㅇㅇ동 개 세 마리와 연못이 있는 집 등 그 집의 특징으로주소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대부분의 우체부들이 오래 일 한 사람들이라편지나 엽서는 별문제 없이 도착했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큰 도시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의 이름으로 온 우편물을 자세히 보니 한 번 반송되었던 편지 봉투에 사돈댁의 메모가 적혀 우리에게로 다시 배송되었다. 시 우체국 반송우편 처리부에서 일하는 사돈댁이었다. 아이가 두 살이라 아직 우편함에 아이의 이름을 추가하지 않아서 아이의 이름을 찾지 못한 우체부가 다시 들고 간 것이다. 마침 사돈댁이 그 우편물을 보게 되었고 우리 주소와 아이 이름을 알고 있던 그가 남편의 이름을 추가로 적어 발송인에게 반송하지 않고 다시 보낸것이었다.
여기는 건물 당 딸랑 하나의 주소가 부여되고 그 건물에 몇 세대가 살던 모두 이름을 찾아 우편물을 배달하는 믿을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한다. 저 때 우리 아파트 건물에는 30세대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우체부는 그 30세대의 우편물을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분류해 배달했다. 그 정겨운 우편 시스템이 실은 변화하고 있는 대도시의 공동 주거문화에는 전혀 부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저 대도시를 떠나 다시 작은 마을에 정착하였다. 정겨운 우편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다. 우리는 16번지에 산다. 12번지에 사는 비슷한 성을 가진 아저씨네 우편물이 가끔 우리 집으로 오면 나는 우체부가 새로 왔음을 알아채고, 아저씨네 우편함으로 다시 편지를 배달해 드린다. 이 주 정도만 이렇게 하다 보면 일이 익숙해진 우체부는 정신을 차려 다시 숫자 12와 16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불편한 일이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지는 시골의 일상이 좋다.
바닥에 부서져 없어지는 볕이 아까워 나는 그 살레에서 부지런히 식물들을 키워냈다.
그러다 나도 볕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식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가 차지해버렸던 자리.
아이가 없는 집이란 저런 것 이었지...
복도 난간의 손잡이는 여전히 샬레의 그것이었다.
바깥에서 보면 영락없이 샬레였지만 내부는 무척 모던모던했다. 서까래가 있긴 하지만 스위스에서 저 정도면 모던한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