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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파파 Aug 17. 2022

또 다른 의미의 출근

네, 퇴근의 문은 존재하지 않아요. 퇴사요? 30년 뒤에나 가능할걸요?

"오늘 하루 잘 버텼다." 직장에서의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또 다른 출근길이 열렸다. 육아로 향하는 출근길이다. 사실 머릿 속에는 켜켜이 쌓인 업무 관련 프로젝트들과 이미지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다.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이 또 다른 의미의 출근 길에 몸을 싣는다. 육아 나라의 공주님은 나를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어서 가서 그분을 모셔야 한다.


육아와 가정을 살피는 일(a.k.a 집안일)이 부담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는 '관리자'가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권력을 거머쥔 딸, 그리고 팀원이자 살림부 장관님이기도 하신 아내를 만족시켜 드려야 하는 부담이 있다. 두 번째는 '프로젝트'가 있기 때문이다. 기한이 있고, 마쳐야 하는 일들이 산적하다. 빨래와 청소, 식사, 아이와의 놀이, 세면 등 홀로 감당하기 벅찬 일들을 맞벌이 팀원인 아내와 나누어 담당해야 한다.


세 번째는 '최고위층 상관인 그녀'가 그리 녹록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를 보필한다는 것은 사람이 담당할 수 있는 최고난도의 감정노동에 속한다. 그녀의 마음의 온도는 실시간으로 변한다. 하고 싶은 것도, 해내야 하는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설득은 다른 별의 이야기이다. 아직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그렇기에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소리들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우리는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그녀의 몸과 마음의 언어를 감지하고 해석하여 좋은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네 번째는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양육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부모가 담당해야 하는 영역이다. 물론 아이가 법률적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부모인 우리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육아가 일처럼 여겨지는 마지막 이유는 '일의 중심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육아의 현장에서 '오로지 나를 위하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아이 중심으로 시간이 흘러간다. 더욱이 세 살짜리 초보 아빠에게는 본인을 위한 시간과 아이를 위한 시간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육아, 여유로움과 우아함이 조화된 육아는 사치다. 아이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 주기에도 아직 많이 벅차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육아로 향하는 길은 마치 출근길과 같다. 그것도 퇴근의 문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의 출근 말이다. 맞벌이인 아내와 내게는 퇴근이 존재하지 않는다. 육아와 집안일이 촘촘히 직조되어 있는 이곳에서 퇴근은 마치 무지개와 같다. 보기에는 예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30년 뒤 아름다운 퇴사를 기대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출근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연히 고단하고, 발걸음이 무거운 날이 있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더딜지라도 걸음 옮기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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