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을 극복하는 30대의 어느 여자 이야기
이십 중후반 이유 모를 눈물이 수시로 터졌다. 친구와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술 한잔 기울이는 감성적인 밤, 애인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 도중에도 눈물은 느닷없이 터졌다. 괜찮은 척 꾹 억누르며 살던 나의 마음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막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겼다.
정신과에 가본 적은 없으나 아마 이것은 우울증의 전조 증상이지 않았을까. 어딘가 공허했다.
밝은 척에 가까워 사람들 사이에서는 웃고 떠들지만 뒤돌아 나의 모습은 어두운 그늘이 지고 있었다. 무얼 하던 피로 했다.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금방 기력이 떨어졌고 회사에서는 힘없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정신 건강을 챙기지 못했으니 육체도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암 진단 이후에야 그간의 이상 반응이 떠올랐다.
전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출근길 갑자기 구토가 나왔다. 한참 남은 정거장을 뒤로하고 정차하는 역이 어딘지도 모른 채 당장 내리기 바빴다. 입안에 토사물을 머금고 화장실로 들어가 우웩거렸다. 이런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 멀미도 없었는데 내리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구토가 또 나왔다. 멀쩡히 앉아있다가 내릴 참이었다. 다행히 가방 안 검은 봉지가 있어 급하게 그 봉지에 토를 했다. 위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위 내시경 검사를 했지만 단순 위염이었다.
위 내시경 결과 이상 소견이 없길래 자고로 위장의 기능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안하거나 긴장하면 즉각 반응하니까, 난 그런 성격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언제인가부터 피부 버짐도 일어났다. 여드름도 잘 안나는 피부였는데, 왼쪽 눈 옆이 미친 듯 간지럽고 버짐이 올라 박박 긁었다. 피부과에 가서 약을 바르면 잠시 동안은 괜찮았았다. 그렇게 또 넘어갔다.
필라테스와 요가를 배울 때 호흡하는 시간, 내 숨소리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색색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고 숨 쉬는 것이 어렵거나 하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또 넘어갔다.
이 증상들이 유방암과 관련 있을 거라 생각이나 했겠느냐만은, 유방암 환우들과 이야기하면 내 증상과 비슷했던 분이 몇 명 있었다. 결국 나는 임신 중 발달한 유선이 암 부위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면서 유방 통증이 찾아와 유방암을 알게 된 케이스가 되었다.
암을 진단받고 나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린 시절 나도 오은영 박사를 만났더라면 삼십 대에 깨우친 진리를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지 않았을까.
더 늦은 나이에 알아차리기보다 지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나?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럼에도 나의 가족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내 전부였고, 그로 인해 나란 사람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야무지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야무지고 싶어서 야무진 건 아니다. 위아래로 치이는 둘째인 까닭에 그랬다.
윗사람이 혼나는 것을 보면 '이건 하지 말아야 하지'하는 눈치가 생기고, 아랫사람을 챙기기 위해서는 일찍이 책임감이라는 옷을 입어야만 했다.
사실 난 버거웠으니 야무진 건 타인의 시선에 머물렀을 때나 말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눈치와 책임감은 남들 눈에 제 할 일 잘하는 야무진 딸로 변신시켰지만 속까지 단단하게 바꾸지는 못했다.
과일로 비교하자면 사과 같았다. 사과는 겉은 딱딱하고 씨는 매우 작은 품종이다. 그 작은 씨조차 씹으면 홀랑 삼킬 수도 있기에, 나의 내면은 그 작은 씨 같았다.
우리 집은 허구한 날 부모님이 싸웠다. 바람 잘날 없었다. 초등학생 이전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큰 상처가 된 일들은 어렴풋 그때의 일이 떠오르며 그때의 마음이 여전히 남는다.
6살 정도 됐을 무렵의 일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엄마의 어떠한 행동이 싫으면 기어코 큰 소리를 냈고 몰아붙인 날이 수없이 많았다. 과격한 아빠는 엄마가 맞대응이라도 하는 날엔 더 난리 부르스였다. 젊었던 엄마는 견디기 힘들어 집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있는 장소를 안 아빠는 엄마에게 돌아오라고 했다. 완강히 거부하던 엄마를 설득시키기 위해 아빠는 어린 나와 남동생의 손을 붙잡고 엄마를 찾았다.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올 수 있게 불쌍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봐야지..' 어린 내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은 몰랐을 테고 그저 엄마 없는 세상은 모든 걸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결국 우리를 봐서 돌아왔고 지금도 자식을 보며 산다. 그러나 그 일은 내게 충격이었던 것 같다. 어릴 적 매일 같이 꾸던 악몽이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에게 항상 쫓기며 그 아저씨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꾼 날은 하루가 꺼림칙했다. 아마 엄마가 나간 그날 이후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우리 집에 경찰차가 온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그중 중학생 때의 일이다. 하루 걸러 하루 부부 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지만 특히 뭔 일이 꼭 터질 것 같은 잊을 수가 없고 두려움에 휩싸였던 큰 사건이나 싸움들이 있다.
우리 집은 아빠 혼자 집안 경제를 책임졌다. 엄마는 가정주부였고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름 중상층에 속하지 않았나 싶다. 아빠는 월급이 아닌 사업 소득자였기에 엄마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하루 100만 원-200만 원씩 현금을 다발로 갖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세는 기울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정도 때였다. 그 많던 돈을 주식에 투자하면서 집 몇 채를 날렸다. 아빠는 점점 더 이상해져 갔다. 알코올에 빠지는 날들이 수두룩했고 난폭해졌다. 한 날은 죽을 거라고 한바탕 소동을 치르면서 창문에 매달리려는 아빠의 옷자락 끝을 잡으며 난리가 났었다.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행위를 할 만도 했다. 아빠는 힘들게 일할 줄만 알았지, 돈이 따라오는 인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 아빠는 쿠웨이트로 파견되어 해외에 나가 일을 배워와야 했다. 홀로 타국에서 5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와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여동생 부부에게 사기를 당해 벌어온 돈이 한순간에 홀랑 다 날아갔다. 여동생 부부는 이후 미국으로 야반도주해 잠적했다. 막내 동생이 추천한 부동산에도 투자했다가 기획 부동산 사기를 당해 몇 억 상당의 돈이 날아가기도 했다.
돈이 많다는 것을 사람들은 개코처럼 맡았다. 주변에 돈 빌려달라는 사람이 많았는데, 사람을 믿고 빌려준 적도 많았지만 받지도 못했다.
거기에다 한방을 바라며 주식까지 했으나 실패했다. 사회가 변하며 아빠의 일거리도 확연히 줄었고 아빠와 함께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건물주, 땅부자가 되었으니 인생을 헛되이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테다. 그러나 그 곁을 함께해야 하는 가족은 괴롭다 못해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코올은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한 가족을 망치는 중독 중에 상(上) 중독임이 틀림없었다.
아빠 기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집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 마신 술은 여과 없이 폭력성이 나타났다. 아빠가 조용해질 때까지 우린 어르고 달래거나 그것도 먹히지 않는 날엔 새벽 4-5시가 되어도 온 가족 잠을 자지 못했다. 자고 싶어 누우면 거실 밖으로 나오라고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며 괴롭혔고 밤을 꼴딱 새운 채 등교 했던 적도 많다. 숙면은 곧 삶의 질이라는 표현이 꼭 맞다. 숙면을 하지 못한 날이 지속되다 보니 나의 하루하루들 또한 피폐했다.
이런 집에서 자랐어도 정상적으로 자란 구김살 없는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아이들과 웃으며 지냈지만 하교 길이 무서웠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집 안의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무섭고 공포스러운 나날들이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도 나이만 먹었다. 여전히 나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지 못한 성인이 되어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몰랐다. 어느 순간 불안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집이 불안하니 밖에 있어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했고 그 불안을 잠재우려고 억지 긍정을 내세우기 바빴다. 그럴수록 가족에게 더 집착했다. 내가 좀 더 희생하고 책임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고.
아프고 난 후 제일 먼저 아빠를 가장 원망했고 이어 묵묵했던 엄마를 원망, 형제까지도 원망했다. 그냥 우리 가족 전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원망을 해봐도 내 마음이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다. 암 발병은 결국 내 인생의 일부 이야기가 되었으며, 원망은 그저 잠시 내 마음 편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지금 우리 집 상황은 어떠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드라마틱하게 사이좋은 가족이 된 건 아니라 말한다.
그래도 분명한 건 내 눈에만 알 수 있는 미세한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아프니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 소리지만 나의 아픔이 가족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나는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오롯 내가 보이는 삶을 사니, 치료로 약해진 몸이 됐을지라도 정신은 예전보다 맑다.
이제는 아보카도처럼 살고 싶다.
아보카도는 생으로 먹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먹으면 정말 맛없다. 샌드위치나 샐러드에 넣어 먹거나 덮밥에 버무려 먹는다. 음식에 색깔과 맛을 더하는 보충적인 재료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재료들과 잘 섞이는 아보카도처럼 살고 싶다.
후숙 되면 겉은 말랑해지지만 씨는 여전히 단단한 아보카도처럼 어떤 힘에 의해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속이 꽉 차게 살고 싶다.
나 이제 아보카도처럼 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