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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시 Mar 12. 2023

겨울왕국 엘사가 나다

대한민국 남자 높이뛰기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우상혁 선수가 올림픽에서 한 말이 인상 깊었다. 워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뉘앙스는 대강 이랬다.


'저는 올림픽을 즐깁니다!!!'​​


요즘 20대 젊은이들은 다 저런가? 얼핏 젊은 패기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우상혁 선수의 표정은 올림픽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을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섬광이 비치었다. 그 선수가 가진 젊음은 그저 반찬에 불과했고 실은 큰 무대에서 뭘 해도 해낼 그의 깜냥에 놀라서 뇌리에 박혔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우상혁 선수의 좋은 소식이 들렸다. 국제 선수권 대회에서 메달을 거머쥐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젤로다 항암(젤로다란, 알약으로 먹는 경구용 항암제에 속함) 마지막 차수를 끝내고 한 달 만에 병원을 찾았다. 그날은 다음날 힌남노 태풍이 올 거라는 뉴스로 도배된 날이었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면서 마음은 심란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간단히 먹고 아침 일곱 시 조금 넘기며 출발했다. 비가 제법 내렸다. 서울 출근길과 맞물려 병원까지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 창문을 타닥타닥 두들긴다. 빗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차 안에서 기분과 몸이 축 가라앉았다. 나는 당장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왠지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



마침 아빠는 라디오를 켰다. 개그맨 김영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마음과는 달리 김영철의 호탕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내용은 상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김영철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불안을 즐깁니다!"​​​


불안을 즐긴다고...?

불안이 싹을 틔우면 어떻게든 그 싹을 잘라내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불안은 공포고 두려움이고 겁에 질리게 하는 놈이 아니던가. ​​인간은 크기에 상관없이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불안의 종류도 그만큼 다양하다.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혼자 상상하며 만들어내는 것도 불안의 일종일 텐데, 누구는 불안을 회피하고 도망가는 반면 누구는 즐긴다. 성적이 어떻든 간에 어떤 선수는 올림픽에서 극도의 긴장을 하고 어떤 선수는 즐긴다.


​​

나도 지금껏 불안을 잠재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나의 불안은 어쩔 수 없이 암에 걸렸었기에 건강 관련이 된다.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닥치면 '보이지 않던 암이 툭하고 다시 튀어 올라 재발로 이어질 것 같아... 어떡하지?' 걱정하며 산다. ​​1년의 치료 과정을 마치고 일상 속에 스며들며 살아도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나만 느끼는 불안이다. 날씨로 인한 불길한 예감은 결국 아빠와의 다툼으로 이어졌다. 삶이 행복으로만 가득 차 살 수 없다는 건 절실히 깨달았는데, 아직도 불편한 감정들을 다루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마음이 단단치 못하다. ​​



그리고 최근에 겨울왕국 시즌1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개봉 당시엔 노래 좋네, 정도로 영화 후기를 마쳤지만 이제와 다시 보니 엘사가 나다!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고 살 것을 강요하던 부모, 그럴수록 더 두려운 엘사다. 마지막에 렛잇고를 부르며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할 때 가슴이 뭉클했다. 마침내 불안을 깨고 두려움을 이겨낸 엘사에게서 앞으로의 나를 봤다.

꼭 모든 불안에 어벤저스 급으로 맞설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항상 웅크려 있을 수만도 없다. 그렇다면 불안 장애로 마음이 힘들 때, 그 불안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이제야 우상혁 선수의 표정과 말이 왜 인상 깊었는지 다시 알았다. 세계 인구가 보는 큰 무대 앞에서 불안을 비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당당하게 즐기는 모습을 독식한 그를 존경했던 것이다. 내게 지금 당장 필요한 마음 가짐을 그에게서 본 것이다. 해답은 김영철의 라디오에서 찾았지만.

그럼 나는 불안을 즐기며 사는 인생을 가보련다. 불안이 스멀스멀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면 ‘요즘 네가 나태해졌으니 관리하라’는 차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다.

지금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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