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종종 엉뚱한 질문을 갑자기 던지곤 한다. 여느 때처럼 함께 식사 중이었다. 밥 먹다 말고 남편은 뜬금없이 환생에 대해 묻는다.
‘여보는 환생을 할 수 있다면 환생하고 싶어?’
나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응. 환생해서 다시 잘 살아봐야지. 근데 당신 말이야! 이런 비슷한 것들을 자주 묻는 거 알아?’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사후 세계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그럴 수밖에. 우리에게 친숙한 하느님 말고도 신은 엄청 많잖아. 나는 그 많은 신 중에 반드시 하나의 신은 존재했으리라 굳게 믿거든. 보통 사람들은 환생하는 삶을 택하겠지? 나도 예전엔 그랬고. 그런데 요즘은 아이 한 명 키우기도 힘든 시대라 우리 아이가 혹시 잘못되진 않을까 걱정도 되고...
치솟는 고물가에 요즘 같아서는 선택해야 한다면 환생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살다 보면 겪어야 할 슬픔들도 많잖아. 굳이 환생해서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
어느 편에 서면 남편의 말은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으로 비치겠지만 내 편에서는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이 사람도 크게 말을 안 해 그렇지, 힘들구나.
‘삶은 기적입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희망적인 말이 때때로 식상하게 들릴 때가 있다. 모든 순간이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어도 과연 무엇을 위해 이토록 감사를 찾는 것인지 가끔 혼란스럽기도 하다.
수십 년을 버티는 능력이 있는 잡초의 씨앗처럼 내 안에서 평생 머물고 있는 근절하기 어려운 부정어가 무성히 자랄 때면 ‘삶은 그저 살면 될 일이지, 기적이나 선물 따위의 예쁜 단어와 조합할 필요가 있나?’ 하고 건조해진다.
삶이 끈질길 때, 그때야말로 삶의 진실한 순간이 찾아온다
좌측 유방에 모양 나쁜 혹이 있다고 말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혹은 유방암으로 확정되고 3기 말로 최종 진단이 내려졌을 때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런 순간에 사형수의 심정을 갖다 붙이는 게 누군가에겐 결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사형수의 심정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찰나 그 순간만큼은 죄질을 떠나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이 두려워 삶 그 하나만 강렬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제게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십사, 신에게 청하고 또 청하지 않을까. 극악무도한 짓을 한 세상 나쁜 놈도 삶을 더 살아보고자 외칠 테니 삶의 본질이란 게 그렇다. 끈질기다.
만약 심판대에 올라 나의 죄질을 묻는다면 언젠가부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행동이 죄목이 될 것이다. 삶이 완벽하기를 바라며 상황을 통제하며 절절매었던 내 마음이 곧 감옥이었을 것이다. 암이 찾아오기 전까지 밥 먹듯 옥살이를 자처 한 셈이다. 그때는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것에 끌려다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다. 암을 진단받고 살게라도 해달라 빌었을 때 삶은 그 자체로 진솔했다. 바라는 것 없이 주어진 삶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니까.
암은 암이고 삶은 삶
그렇게 삶에 충실하며 암 발병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난 180도 탈바꿈했을까? 한 번 더 살 기회, 환생을 하고도 재발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산다. 재발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두려움이 꿈으로 발현되거나 불면증으로 종종 찾아온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유방을 여기저기 만지며 딱딱한 것은 없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가만있어도 숨소리가 거칠진 않은지, 림프가 붓지는 않는지, 대변은 잘 보는지 내 몸에 관심이 너무 많다. 관심 없던 때보다 낫다고 할지라도 그 염려가 커서 문제라는 것. 맞다. 난 건강 염려 증세를 겪고 있다.
암은 왜 하필 나에게 왔을까 하는 물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암으로 살아갈 이유를 가졌지만 지금은 암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느꼈다. 삶 영역으로 들어오니 암 진단을 다시 받고 싶지 않고 진단보다 더 무서운 치료를 피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에서 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걸까?
스스로 물어본 적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토닥이는 건 그때뿐이다. 효과가 짧았다. ‘한 번뿐인’ 형용사로 삶을 꾸미려고 시도하자 암 재발이라는 포커스에서 벗어나 시야가 넓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회사를 퇴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 찾아 떠나는 모험적인 인간은 되지 못할지라도 한 번 뿐인 삶, 두려움으로 또다시 끌려다니는 삶만큼은 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모두는 죽음의 방향키가 설정되어 있다. 사후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면 죽음은 죽는 것이듯 삶도 삶인 것이다. 그러기에 암도 암인 것이다. 삶과 암이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여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의사가 된 듯 처방을 내렸다. 그 처방전에 이렇게 적는다. ‘암은 암이고 삶은 삶이다.’
암이 또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된다고 해도 이 처방전이 있다면 재발도 재발인 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으로 매일을 벌벌 떨며 살기엔 시간이 아깝다.
길고도 짧고, 짧고도 긴 삶 안에서 암은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나의 삶에 있어 환생 같은 존재다. 덕분에 다소 건조한 ‘삶은 선물입니다.’ 문장 보다 '암은 제게 있어 선물이더군요.’로 바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삶을 사랑하기에 환생을 택합니다
그저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자. 좌절이었던 암을 선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삶의 단순한 명제에서 감정만큼은 팔딱팔딱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오늘은 모든 치료가 끝나고 6개월마다 검사하는 첫 유방 정기검진 날이었다. 희로애락의 나날을 보내다가 검진일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전날은 긴장의 밤으로 잠을 청하기 힘들다. 뜬 눈 지새우며 병원 가는 당일, 길 위로 뿌리는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왕복 4시간, 소중한 시간에 글을 쓰며 긴장 대신 평안을 찾고 오롯 혼자 걸으며 희열을 만끽한다.
사실 쓰는 내내 결론이 나지 않는다. 꿈을 향해 수없이 실패해도 일어난 마이클 조던과 달리 난 실패를 사랑하긴 힘든 인간 유형이라 글은 똑바로 써도 마음은 두려움의 불씨가 남아있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또렷이 말할 수 있는 건 삶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
적막이 흐르는 유방 초음파 실에 누워 몰캉한 젤을 뿌리고 내 가슴을 확인하는 영상의학과 교수를 아래서 위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남편의 물음에 여전히 환생을 택해야지.
다만 쉽게 말한 처음 답변을 수정한다. 더 잘 살기 위해 환생을 하는 건 아니라고. 사후 세계 믿음은 부족한 나지만 삶을 더 사랑하기에 환생을 택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