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혈액형 대신에 '너 MBTI가 뭐야?'라고 묻는 게 유행이다. 심지어 채용조차 MBTI를 기재하도록 요구하는 회사도 있다는 것을 맥연히 기사로 접했다.
MBTI, 대세는 대세다.
E냐 I냐에 따라 외향인과 내향인으로 구분하고 J가 들어가면 계획적인 성향이라고 한다. F는 감성적, T는 이성적 사람이라나 뭐라나.
MBTI는 자기 진단 형태다. 결국 내가 판단한 나의 모습인데,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이랑 다를 때가 많다. 또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자신의 모습이 바뀌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그런 MBTI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MBTI는
'내가 생각하는 나'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내가 다를 때 재밌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라고 했다.
이어 "내가 소심하다고 생각해 조용히 지내보려고 했으나 정작 남들은 오락부장에 추대한 경우"와 "나는 극도로 치밀한 계획 주의자인데 주변에서는 내가 즉흥적으로 한다고 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인간관계에서 타자와 나 사이에 생기는 재미난 틈은 상대와 몇 마디만 나눠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친구는 내게 '너 E(외향) 아니었어?'라고 한다거나 또 다른 친구는 '넌 딱 봐도 J(계획)야'라고 했다.
난 그런 시선의 차이를 두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네.'라고 여겼다. 김영하 작가처럼 재밌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고 생각하기보다 역시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며, 더 정확히는 나를 몰라준다고 장벽을 세웠다. 남들에게 어차피 깊은 속내를 꺼내봤자 진심으로 듣지 않겠구나... 그렇게 차가운 칼날 하나를 가지고 다니며 장벽이 생기면 언제든 타인과의 관계를 마음에서 뚝뚝 끊어냈다. OUT!
나 스스로 나를 잘 알면 그만이지 뭐! 하고 쿨한 면모를 보였지만 내심 남들이 내 마음을 세심하게 알아주기를, 쉽게 판단하지 말기를 바랐다.
순간순간 내 모습을 바꾸기도, 바뀌어가기도 하는데, 나도 나를 모를 때가 많은데 어떻게 남들이 나를 세심하게 알아줄까? 모순 있는 내면 깊숙이를 들여다보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부탁도 하며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최근 친구랑 대화를 나누다가 MBTI를 언급했었다. 친구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자신의 성향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말했다.
"나는 E(외향)인데 왜 점점 I(내향)가 되어가는 것 같냐. 그리고 난 친구들이랑 놀러 가면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J(계획적)도 아닌데 J가 되더라"
친구의 말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실소를 하였다.
"어라 진짜 그런 듯! 오히려 내가 J인데... 네가 더 여행 전에 이것저것 잘 찾고 준비를 잘하잖아."
그녀는 예술적 감각이 있는 친구다. 감성적인 장소를 잘 찾아내고 맛있는 음식점 발견도 잘한다. 그 친구와 여행하면 배경이 기가 막힌 곳을 편하고 쉽게 갈 수 있었다. 늘 그 친구가 잘하니까, 으레 당연하다는 듯 나는 신경을 안 쓰고 넘긴 적이 많았다. 그래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친구를 J(계획) 형 인간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집에 와 곰곰 생각해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한다고 좋아하는 건 아닌데...
계획적인 J라는 성향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난 왜 J이며, 정말 J인 건지.
또한 친구는 J가 아닌데도 불구 J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인지.
내가 MBTI에서 J가 나온 데는 아마도 일정을 미리 짜 놓고 그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영향으로 보인다. 성격도 급해 빨리빨리 그 임무를 완수하려고 한다. 예컨대 해외여행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해외를 가자고 마음을 먹으면 한시가 급하다. 특히 결제하는 영역에서 계획적이다. 저렴하게 표와 숙소를 예약해야만 한다. 어디를 갈지 발품 팔아 알아보고 특정 장소 티켓이 필요하면 그것을 알아보느라 삼매경이다.
또한 내 집 마련 계획을 위해 청약 제도를 알아보느라 책을 완독하고 사람들의 정보를 모아 조건에 맞게 준비했다. 각종 보험에 관한 정리가 필요하다 싶으면 보험 셀프 리모델링에 나선다. 결혼 생활 전반적인 돈 관리도 당연히 내가 맡았다. 한 달 간의 살림 꾸림, 노년 대비 자금 등에 있어 꼼꼼하게 계획했다. 그렇게 준비를 해놔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래야만 뿌듯함을 느끼고 살았다. 현재를
집중하기보다 미래를 우선하여 사는 삶에 치우쳤다.
그런데 정말 나는 이런 행위들을 좋아했을까?
주변 몇몇은 나에게 계획적으로 착착 잘 준비한다고 했다. 잘한다고 해주니까 으쓱해서 좋아하는 것인 줄로 착각했다. 그러다 보니 부탁하며 사는 법을 몰랐다. 오히려 내가 맡겠다고 더 난리였다.
그러나 난 좋아하지 않았다. 아프고 나니 부탁해야 할 일과 기대야 하는 찰나의 순간과 마주해야 했다. 항암 때문인지 출산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머리가 둔해지고 멍한 날이 많았다.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돌아서면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 말한 거였나? 어제였나? 헷갈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간호사나 의사의 말을 주의 집중해서 듣기가 어려웠다. 매사 남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나 초반엔 아픈 것보다 기대는 방법을 몰라 힘들었다. 여태 손, 발, 머리 내 의지로 안 되는 것 없이 자유로이 행했던 것들에 이상 신호가 오면서 남편에게 의지해야 했다.
'여보. 저것 좀 해줄 수 있을까? 아까 그 말이 뭔 말이었지? 나 못 들었네?'
바보가 된 것 같은 설움이 복받쳤지만 이내 부탁의 신이 되었다. '여보. 이것 좀 해줘. 저것 좀 해줘!'
남편은 용돈만 받아 쓰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이번 달은 얼마 저축했으며, 우리가 일군 자산은 얼마라고 말을 해줘도 귀동냥으로 들었다. 그런데 병마 이후 남편은 육아휴직, 나는 질병 휴직으로 인해 수입이 절반 이상 가까이 줄자 저축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몽땅 쓰기 바빴다. 마이너스만 안 나도록.
엇!
예전엔 허투루 돈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내가 거친 사막의 길에서 쓰는 맛을 알았다. 그동안 나는 계획적으로 사는 삶이란 틀에 갇혀, 그것이 온전히 나라고 믿었기에 아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욜로족은 이 시대 광고의 노예라고 생각하며 옷 하나를 사더라도 고민을 많이 하고 식비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다 낭비라 여기며.
내가 말하는 풍부한 지출은 부자처럼 샤넬 가방을 여러 개 살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건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엔 여전히 변함없다. 가난한 노년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살뜰히 저축하는 사람들이 잘못 되었다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목적은 언제나 아름답다
미래를 계획하는 삶도 분명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 당장 몇 시간 뒤의 일을 계획하는 것에 큰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저축의 양을 줄이며 쓰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며 사는 무계획적인 삶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계획했던 일이 틀어지더라도 그것을 메꿀 다른 방식의 행복이 온다는 것도 알았을 뿐이다.
올 초 봄이 생각난다. 방사선이 끝난 4월 진달래가 한창 피는 시기였다. 방사선이 끝나는 날 남편과 꼭 진달래 보러 가자고 약속했다. 진한 분홍 물결을 보고 싶었던 갈망을 품은 계획은 무산되었다. 전날 갑작스레 항암 부작용으로 고열과 기침, 무기력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 남들은 볕 좋은 날 카카오톡 프로필에 꽃구경한 사진이 올라오는데. 그땐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메마른 마음을 꽃으로 적시고 싶었는데, 방사선 치료의 끝을 꽃으로 피날레 하고 싶었는데 누워만 있었다. 대신 만개한 벚꽃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병원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무성히 핀 벚꽃이 휘날렸다. 200미터 앞 한강까지 이어 있는 길이 나에게 이리오라 손짓했다. 아무 곳에 자리를 잡고 땅에 털썩 앉아 한강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계획에는 전혀 없던 일이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계획을 하면 모든 계획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거든.
- 영화 <기생충>
계획이란 건 틀어지라고 있는 거였구나!
난 이제 무계획의 기쁨도 함께 누리므로
J라고 완전히 믿기 어렵다. 이러다 또 어떤 일을 계획하면 J가 나올테고 무지 귀찮으면 J를 거부하고.
그래서 J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J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