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난 이후 크게 깨달은 게 있다면, 뜻대로 되걸랑 그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지켜준 어떠한 신이 곁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나는 그동안 상황과 사람을 모두 통제하고 싶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통제란 단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진 몰라도 어쩐지 그 단어에서부터 불길하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기분이다. 통제 중에 하나라도 삐끗하다가는 왠지 나락으로 떨어져 망할 것 같은 초조함마저 든다.
사람은 매초 선택을 하며 삶을 짓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지 말지, 양치를 할지 말지, 물을 마실지 말지 하는 일상 속 작은 선택부터 대학을 갈지 말지, 결혼을 할지 말지, 아이를 낳을지 말지 하는 인생의 큰 선택에 이르기까지.
선택에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함께 달려오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이 오면 언제나 고민된다. 고민하는 건 분명 좋은 현상이다. 그만큼 자신의 인생에 예의를 갖추는 행동인 거니까. 그럼에도 고민한 양만큼 결과가 베스트였는지 곰곰이 떠올리면 아닐 때가 많다. 충분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에도 후회는 생기고 대충 내린 선택이 뜻밖에 좋은 결과를 안겨준 적이 있다.
크게 고민이 필요 없는 사소한 일에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잠을 포기하고 그 어렵다는 10분을 일찍 나오는 편을 택했는데 신호란 신호에 족족 걸려 결국 늦어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좀 느긋하게 가도 되는 때에 할 일 다 하고 나섰는데도 기가 막히게 대중교통을 딱딱 제시간에 맞춰 타 너무 빨리 도착한다거나.
늦게 도착하면 잠을 더 잘걸 후회하고, 너무 빨리 도착하면 '난 역시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군.' 하며 어깨를 으쓱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안달복달 살고 있진 않나?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이라 믿었지만 언제나 그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기를 노심초사했다.
'내가 선택한 일은 곧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란 전제는 바위 하나를 머리에 이고 가는 기분이었다.
책임감도 책임감이지만 보태어 실패가 두려웠다. 실패를 하면 성장을 한다는데...? 실패에 관한 명언을 들어도 정작 내 일이라면 좌절만은 피하고 싶은 일이 된다. 잠시 다른 길로 회차하더라도 괜찮다 말해주는 어른이 없었다. 주변에는 '이렇게 살면 실패하지 않는 101가지 방법'을 읊조리는 어른들만 있었다. 그 표준화된 문장들을 우리의 목에 떡하니 걸어줬다.
'그 집 애는 서울대 갔대.' , '안정된 직장 들어가야 네 삶이 평탄해.' , '돈 많은 사람 만나라. 결혼해서 살아보니 결국은 돈이더라.' ,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 '결혼했으면 애 낳아야지. 그래야 안 갈라서고 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른말도 아니다. 동그라미(O)와 엑스(X)를 치면서 옳고 그름의 정의를 내릴 만한 주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뿌리 깊게 박힌 문장은 그리 해야만 하는 노선을 제공했다. 그래서 항상 더 두려웠다.
물론 나보다 최소 몇 개월 더 살아본 자의 경험을 새겨들으며 내게 맞는 방향을 설정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표준화된 문장들은 이윽고 남보다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 그 수단은 결국 나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세상만사 내 맘대로 컨트롤하고 싶던 나날
한편 돌이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까? 아니었다. 병원을 오가며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20대 중반 9박 10일 혼자 미국 여행했던 때를 회상했다. 나 홀로 심지어 먼 미국 땅을 여자 혼자 여행하겠다는 건 내가 나에게 내민 도전장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아 겁이 많아진다는 누군가의 말에 젊음이 주는 아름다운 도전을 내걸었다.
그 당시 엄마 친구들은 마치 당신의 딸처럼 걱정하며 물었다. ‘딸 혼자 여행 보내는 거 무섭지 않아? 미국은 총도 쏘고 위험하잖아? 내 딸이 그런다고 하면 절대 못 보내.’
그 말을 전해 듣고 ‘그 퍼센트가 얼마나 된다고! 죽게 될 운명이라면 죽겠지 뭐.’
무모하고 불효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 혼자 여행할 시간과 돈을 준다고 한들 자신이 없다. 암에 걸릴 확률에 내가 속해 보고 나니 오만가지 위험부터 생각하게 된다. 모든 것이 ‘만약에’로 시작해 ‘어떡해’로 끝나는 상황을 그리기 바쁘다. '갱스터한테 끌려가면 어떡해?' , '어떤 미친 사람이 총을 쏘면 어떡해?' , '마약에 휘말리면 어떡해?'
또한 버킷리스트라는 명목 하에 해보고 싶은 건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거기에는 극한의 기구를 즐기는 것들도 포함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장소에 가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경비행기를 탔고 세상에서 제일 높은 놀이 기구라는 109층 자이로드롭도 탔다. 호주에서는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가평에 가서 번지점프를 했다. 웨이크보드도 즐겼다.
자세히 뜯어보면 그런 행위를 '선택' 했지만 그 이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속뜻이 숨어있었다. 그렇지만 크게 진지하지 않았다. 그저 도전적인 내 모습이 좋았고 이런 걸 해봤다 하는 경험이 쌓이는 기분이 맘에 들었다. 남들에게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이미지를 만들어 은근히 자랑을 즐기기도 했다.
계획하고 실행한 일에 늘 요행이 뒤따랐다. 큰일이 생긴 적은 없었기에 위험한 행동을 하고도 무탈한 것이 요행인지 미처 알지 못했던 나날이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만사 내 맘대로 컨트롤하고 싶었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마저 안정적이었으면 했다. 내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상대가 답답해 보였다. 어느새 내가 하는 말이 곧 정답인 양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바로 실패하지 않는 101가지 방법을 말하는 그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항상 내가 택한 일들이 순탄한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그 모든 밑바탕에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함이 깔려있었다. 상대가 잘되거나 주변이 안정되어야 내가 신경 쓸 일이 적어지니까.
그럼에도 향방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길 위에서 모든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며 살 때 사실 외줄 타기 하는 심정이 들었다. 선택과 통제는 서로 다른 줄기를 타고 흘러간다. 가끔 그 둘의 줄기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은 그것은 온 우주가 돕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삶이 지는 삶은 아니다.
나는 전보다 마음이 평화롭다. 통제하는 일이 적어진 덕분이다. 이미 물음에 통찰해왔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인다. 내가 전두 지휘할 수 없는 일들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나니 편안하다.
이따금 두려움이 활개를 쳐서 쓰는 글은 어쩌면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은 예측 상황을 제압하려는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년에 드디어 우리 집이 생기네! 게다가 좁은 집을 탈출할 생각과 그 공간에서 남편과 딸과 단란하게 사는 꿈을 꾼다. 그런데 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 행복 누리고 싶은데 산산조각 나면 어떡하지?’
미래의 열망에 발목이 잡혀 통제하기 시작한다. 위험한 장소에 가지 않고, 온갖 영양제를 알아보고, 매사 더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선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하고 말이다.
'30대에는 멋지게 살 거야! 화목한 가정을 만들 테야! 아이를 아주 잘 키워야지! 시간을 계획적으로 써서 공부도 해봐야지! 멋진 여자, 멋진 아내, 멋진 엄마가 되어보겠어!
평탄하지 못했던 가정사만 빼고 보면 남들 눈에 비친 나의 삶은 비교적 평이하다. 학창 시절 그럭저럭 공부를 했고, 가고 싶었던 대학교는 비록 가지 못했지만 재수하지 않고 그럭저럭 대학 생활을 잘 마무리했고, 졸업하자마자 원하는 곳으로 취업했고, 서른을 넘기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으며, 7개월 만에 아이를 가졌다. 목적은 달성한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른 장작 속 군데군데 나있는 구멍처럼 어딘가 허했다. 하루하루 잘 살았던 덕분에 받은 선물이었는데 그저 내가 잘 선택하고 통제했기 때문이라는 오만함에 취해있었다. 도대체 '멋진'의 기준은 또 무엇인 건지.
설령 통제를 잘한 일이라 여겨도 나의 인생 이야기에 병마는 언젠가 찾아 올 일이었다. 막지 못하는 일들은 수시로 생겨났다가 마음을 수정하면서 그렇게 또 살아가다가 또 어쩔 방도가 없는 일이 생겨버리면 울면서 고쳐 살아가면 된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마음에 생체기를 새기며 살아간다.
'심장병을 앓게 된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건 정해진 일이었어요. 그것에 순응함으로써 다시금 삶의 평화와 품위를 찾을 수 있었어요.'
통제란 언제나 좋은 것이며, 일을 돌아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만 했다가는 위험에 처할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에 우리의 통제가 정말로 필요할까요?'
<인생수업 213p>
다시 묻는다. 세상일에 우리의 통제가 정말로 필요할까?
내가 병을 앓게 된 것이 스스로 통제를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정해진 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한 발자국 더 내딛으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외침만이 있을 뿐이다.
'GOD BLESS U (행운이 깃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