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연히 알게 된 ‘매일 글쓰기’ 오픈 채팅방에 참여해 익명의 사람들과 소통한다. 90%가 엄마들이며 하고 있는 일들 또한 다채롭다. 이윤을 창출하고자 모인 것이 아닌 까닭에 회원들은 유익하고 무해한 정보를 공유한다.
그러다 어느 날 링크 하나가 공유되었다. 보그(vogue) 잡지에서 인터뷰한 오은영 박사의 글이었다.
그중 크게 공감한 내용이 있었는데 내가 평상시 느꼈던 생각을 알아듣기 쉽게 정리했다.
내용인즉슨, 요즘 우울증을 호소하는 20~30대 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세대 여성들이 결혼을 하면 상실감이 더욱 커진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울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로 SNS를 꼽았다. SNS는 아주 디테일한 삶까지 타인과 나를 비교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이 때문에 자존감도 무너진다고 했다.
나는 SNS가 자존감을 낮춘다는 사실에 마음의 조명이 딸각하고 켜졌다. 나 또한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활동했었다. SNS의 브랜드만 달라졌을 뿐 학창 시절부터 싸이월드, 페이스북을 거치면서 사진으로 나를 드러내는 일은 친숙한 일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관계를 편하고 빠르게 확장시킬 뿐 아니라 '나 잘 사는 중'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형식이 섞여있을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칭찬이 달리는 댓글을 보는 기쁨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나를 꾸밀 수 있는 외모 원동력이 되고 상대방의 사진을 통해 최신 트렌드도 알 수 있었다. 소위 사람들이 찾는 핫한 장소나 스타일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증하기가 대세라...)
하지만 어느 순간 자극적인 행복만 추구하고 있었다. 해외여행은 나를 위한 보상이자 선물이라 표현하면서도 더 깊숙이 파고들면 ‘나는 언제든 국내외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영혼’ 임을 남들에게 굳이 굳이 보여주고 싶었다.
땀나도록 운동을 하고 그 모습을 찍어 ‘나는 자기 관리가 투철한 사람’이라는 것도 굳이 굳이 드러내고 싶었다.
분명 마음은 허했는데도 말이다. 누구를 위한 삶인지도 모른 채 남의 일상을 노크도 없이 넘겨다보는 것에 나도 모르는 사이 부러워했다.
언제나 난 부럽지 않다고 외치면서도 때로는 부러움에 지지 않고자 하는 행복 승부욕이 생겼다. 그 누구도 대결하자고 도전장을 내민 적 없는 승자 없는 승부욕이었다.
행복은 자극이 가해지면 그 다음번에는 더 강한 자극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그 행복을 찾는 게 아니라 쫓아다녔다. 한번 보여준 행복은 금방 식어 또 다른 행복을 곧장 좇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어딘가에서 본 가물한 기억으로 불교에서는 행복이란 단어가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행복은 사람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헛된 바람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휴대폰 조그만 타자기로 해시태그 행복을 부르짖었으나 그 행복은 해시태그 뒤에 숨은 쉽고 빠른 그저 쾌락의 일종이었다. 더 강렬하게 표현하자면 끊을 수 없는 마약이었다. 행복 마약 거기에 심취해있었다.
살다 보면 저마다 삶에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그 굴곡에 서있는 나는 인스타그램을 삭제하기로 했다. 남들은 행복하게 지내는데 당신은 불행해서 삭제한 건 아니냐고 묻는다면 분명히 외치건대 불행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하고 괜히 찔려 날선채로 반문하고 싶지 않다. 먼발치에 서서 마음을 살피면 씁쓸한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씁쓸함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스타그램을 보며 나를 더 정글로 내몰 필요는 없었다. 나의 길을 뚜렷하게 가기 위해 세밀한 모습까지 보여주려는 도구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추억이라는 미명으로 계정마저 없애긴 힘들었다. 대신 비공개로 전환하고 로그아웃하여 애플리케이션을 지웠다.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앱을 지우는 일에 큰 결심이 필요했다. 인스타그램으로 친구들의 소식을 보았는데 상대와 나를 이어주는 연결 장치가 없어졌으므로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스타그램 없어도 잘 산다. 심지어 더 좋다!
물론 인스타그램의 순기능이 있기에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스타그램을 삭제하니 삶이 조금 더 가볍다는 것뿐! 그간 인스타그램을 없애고 생긴 일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일상이 지루하면 자연스럽게 남은 뭐하나 궁금해서 인스타그램을 켰다.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는 일 대신에 궁금하면 친구의 안부를 통화로 묻는다. 워낙 텍스트로 연락하는 것이 익숙한 세대라 처음에는 친구도 나도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어설펐다. 그럼에도 문자보단 음성이 여전히 더 따듯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돈 쓸 일이 적어졌다. 지나가는 버스에 붙여진 광고만 보더라도 사람은 매 순간 광고에 노출된다. 인스타그램은 특히 광고에 매료되기 일쑤다. 게다가 로직은 내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다. '이게 필요할까?' 갈등하는 소비자를 판매 업체들은 부리나케 달려와 내 앞에 도착해 '골라 골라 마음껏 골라.'하고 확성기를 킨 것 같다. 사고 싶게끔 제품을 상세히 설명하고 노출시킨다. 결국 딱히 필요 없던 제품인데 기어코 구매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소비가 사라졌고 알고 보니 그것들은 필요한 제품들이 아니었다.
휴대폰을 잡고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사진을 게시하고 누가 내 사진을 보았는지 은근히 궁금해서 일일이 확인했다. 댓글은 누가 달았는지 보느라 바빴다. 자주 사진을 올린 탓에 휴대폰을 손에서 한시도 떨어뜨리지 못했다.
지금은 내가 필요한 때만 휴대폰을 찾아 활용할 뿐이다. 뜰채로 행복만 건져 올리기 위해 바빴던 삶이었다. 지금은 내 삶을 살고 있는 덕분에 상대방의 칭찬을 확인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한다. 내가 어떤 일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지 귀를 기울인다. 남들이 공예 취미를 가지고 업로드하면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 대신에 진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
진정 어린 선물을 주고받는다. 나도 MZ 세대라고 한다.
MZ 세대의 경우 90%가 이용하는 일이 기프티콘을 소비하는 일이라고 한다. 나도 익숙하다. 더하여 인스타그램에서 특별한 날에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을 인증하는 샷이 유행처럼 번졌다. 고마움의 인사이긴 한데 어느새 자랑도 섞여있고 인맥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변질된다. 그 인증 사진을 보고 있자면 그 친구에게 나도 선물을 해줘야만 할 것 같은 불편함이 올라온다.
썩 엄청 친한 친구도 아닌데 카카오톡으로 들어가 선물을 해준 적이 몇 번 있다. 지금은 그 인증 사진을 보지 않으니 정말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선물한다.
기브 앤 테이크 문화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행위지만 과하면 어딘가 불편하다.
개인 정보 노출을 막는다. 일상을 공유하는 일은 사생활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 사람이 무얼 먹고 어딜 가고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사건 중 하나가 스토킹이다. 디테일한 삶을 스스로 노출시켜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블로그도 브런치도 SNS 일종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블로그로 수단만 또 바꾼 것은 아닌지, 자기 의심이 들었지만 보여주기 집착은 없다는 것이 큰 변화다. 코에 걸면 코걸이겠지만 스스로 일컫기를 글쓰기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