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지에 푹 퍼서 올린 된장과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상추가 올라온 저녁 밥상.
엄마는 고기 한 점 없이도 쌈과 된장 하나로 우물우물 복스럽게 밥을 먹는다. 그날따라 밥이 당겼던 큰딸은 밥 한 공기 더 먹고자 일어났다. 밥솥으로 향하는 큰딸에게 엄마는 자신의 분량까지 요청했다.
‘오늘 식사 왜 이렇게 맛있지. 나도 한 공기 더 먹을래.
딸~ 내 거까지 한 그릇 더 퍼 와.’
늘 엄마는 자신이 손수 차린 밥을 식사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맛있게 먹는 인물이다. 밥맛 없는 날보다 밥맛 좋은 날이 배로 많은 덕분에 맛있다는 소리를 수시로 한다. 물론 남이 만든 음식을 먹을 때 리액션은 더 크다. 평소 소화 기능이 약한 아빠는 잘 먹는 엄마 모습을 보면서 대리 만족하듯 희미하게 웃곤 한다. 그러나 못볼꼴 다 보고 살아온 노년 부부. 아빠 입에서 반의어가 튀어나온다.
‘우리 집에 식충이가 사는 것 같네.’
그런 말들에 인이 박혀 살아온 지 오래다. 식충이란 단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엄마는 마지막 한 톨까지 싹싹 남김없이 비울뿐이다.
어느 날 쌈 한 박스를 시켰다. 남편과 둘이 먹기에는 양이 많았다. 친정 가는 김에 두 봉지로 나눠 담아 가져 갔다. 무서운 속도로 두 끼 식사 만에 쌈을 몽땅 해치운 엄마를 보고 있자니 '쌈 가져오길 잘했네.'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뒤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엄마는 또다시 자신의 유행어를 말했다.
‘아으... 맛있어. 행복해!’
생각해보면 소소한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내 곁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결코 기쁨을 받치지 않는다.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충청도 특유 느긋한 향내를 풍기며 누누이 말했다.
'돈 많은 사람도 죽으면 결국 재만 남는겨. 지금 행복한 것들 누리며 살면 그만이여.'
스치듯 들었고 와닿지 않았다. 엄마의 가치와 달리 나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므로.
항암제로 미각을 완전히 잃고 대신 한 끼 식사로 큰 기쁨을 느끼는 엄마를 보고 잠시 잊었던 행복의 의미를 깨우쳤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행복하고 싶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데 행복하지 않은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치이고 치인 하루를 끝내고 자리에 누웠을 때 행복한 마음보다 수고스러움이 먼저 생각난다.
'오늘 하루도 정말 수고했어.' 셀프 토닥토닥.
아이를 돌보다 보니, 매일 재우고 먹이고 대소변 치우는 일에 힘쓴다. 신생아 때는 그러한 행위에 더 신경 써야 한다. 그러다 보면 부모가 밥 차려먹는 건 사치스럽다. 애 재우고 아픈 배를 움켜잡으며 겨우 화장실 왔는데 애는 기가 막히게 꼭 그때 운다. 그래서 내 맘대로 볼일 보기도 힘들다. 특히 잠을 자지 못하는데 그것은 곧 부부싸움과도 직결되었다. 그만큼 숙면은 뇌 필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숙면 정화로 깨끗하게 비워지면 맑은 정신으로 다음날을 살게 하니까.
한편,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항암 부작용 중 하나인 불면증은 지독하게 괴로웠다. 미각을 잃어 밥을 먹지 못하고 치약마저 메스꺼움이 올라오며 일반 변비의 고통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배변이 불가능했다. 결국 마약 진통제를 처방받아 항문이 찢어지는 괴로움을 잠시라도 견뎌야 했다. 그러다 보면 만신창이가 된다. 잠이라도 잘 자고 싶었다. 그러나 피곤할 수밖에 없는 하루를 보내고도 자기 위해 누우면 정신이 또렷해지는 그 이상한 현상에 밤이 무서웠을 정도다. 숙면은 꿈도 못 꾸고 새벽 느즈막에 잠이 들 때면, 게다가 잠시 육아까지 맡아야 하는 현실까지 겹치면 평범했던 지난날들에 도무지 실체를 드러내지 않던 행복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잘 먹고 싶고, 잘 자고 싶고, 잘 싸고 싶다...
제발 그러고 싶다...
행복, 그것이야말로 신생아처럼 사는 일 아닐까.
그 시기에 바라건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 곧 행복이다. 더 바랄 게 없다. 어른들의 행복도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상적인 몸매를 바라서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게 되고 먹는 것에 스트레스받는 누군가. 알 수 없는 걱정과 불안에 시달려 불면증을 앓는 누군가. 편하고 빠르다는 이유로 잦은 인스턴트를 먹고 배달음식만 찾아 배변의 불행, 변비나 설사를 앓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바로 나와 너 일수 있는데 일상을 지내다 보면 발견하기 힘들다. 나 역시 그러하며 살았던 자못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신생아의 시절이 있었다.
먹고 자고 배설하기 같은 기본적인 욕구는 대체로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누구라도 기본적으로 주어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약간의 욕심만 내려놓아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본적인 행복을 누리려면 그 행복이 가능하도록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돈 따위가 필요하다.
그 행위를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구조는 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저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서 가보지 못한 환상에 사로잡히고 시간을 낭비하며 허상에 쫓겨 그만 현재를 잊게 된다.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 자는 양껏 잘 먹고 잘 자고 잘 싼다. 그것이 곧 엄마의 모습이었고 엄마가 가르친 행복이었다.
유난히 하늘이 보고 싶었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남편에게 음식물 쓰레기 좀 버리고 오겠다며 혼자 집을 나섰다. 주머니에 에어 팟을 챙기고 잠시 집 근처 언덕에 올라 벤치에 누웠다.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