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이리 쿵 저리 쿵 벽에 부딪히며 내 글에 의문을 품고 다른 사람의 글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자처했을 때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훈풍처럼 다가왔다. 처음으로 작가라는 공식 타이틀이 주어지고 표창창을 받은 사람의 어깨처럼 으쓱하며 우월감을 가지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한낱 기쁨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란 단어는 동상 호칭에 불과했다. 글을 더 쓰지 못하도록 하는 손가락 동상에 걸린 것이다. 글 좀 쓴다는 사람이 다 모인 광장, 브런치에서 내 본래 위치가 생각났다. ‘휴직 중이라 잠시 잊었나 본데 너 원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이내 다른 작가 글을 읽으면서 난 왜 이런 문장이 안 나오는 걸까?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흩어져있던 열등감 덩어리들이 빠르게 재결합하고 큰 덩어리를 만들었다. 학자 아들러는 열등감이 때론 삶의 동력이 된다고 했으나 나에게 는 비해당 마킹되어 되레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으로 작용했다.
글만 그러면 그나마 다행일 수준. 브런치북의 소개글부터 작가 필명까지 내 것만 별로인 것 같은 기분에 몇 번이고 고쳐 쓰길 반복하여 현재까지 브런치 작가 필명을 세 번이나 변경했다. 줏대 없는 인간이지만 허술한 인간맛 나는 인간이라 괜찮다 위안 삼다가도 부모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에 회의를 느낀다. 사회는 말해주지 않아도 온통 비교의 시선인데 정신적 뿌리인 부모라도 비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면서 칭찬 좀 듬뿍 해주지, 얼마나 끊임없이 부모가 비교를 했으면 변하기가 이토록 힘든가 싶기 때문이다. 제일 쉬운 경로로 기승전-부모탓을 했다.
근데 참 희한하다. 나만 빼면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상황이며 돈을 왕창 주는 것도 아닌데 집착했다. 집착을 열정으로 희석해 보지만 영혼 갉아먹기에 가까웠다. 브런치는 글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 내려는 일종에 글쓰기 용 인스타그램 같았다. 매일매일 써서 쓰다 보면 어쩌다가 운이 좋아 잘되는 그런 부지런한 성공을 꿈꾸기보다 당장 이 글 하나에 반짝 스타가 되어 브런치 메인 화면을 장식했으면 하는 소원이 한주먹씩 들어갔다. 그래도 괜찮다. 무명인이라면 가질 수 있는 본연의 감정이니까.
다만 글이 써질 리가 있나. 얼마 해보지도 않고 브런치를 외면하고야 말았다. 대신 진입장벽이 낮은 블로그에 날것의 형태로 편하게 일상을 썼다. 일상을 기록해서 언제든 꺼내어 읽기 위해서. 그러다 블로그도 점점 나태해져 갔다.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은 날에도 무엇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매일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쓰기형 노예 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의 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에너지 소모로 느껴졌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그마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전이가 되고 일상이 다시 무너져 내렸고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서조차 쓰기 싫었다. 팻말을 떼었다 붙이는 일 같아서 공개하기 싫었다. ‘암에 걸렸지만 회복 잘하고 있고 글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라는 팻말을 떼어내고 ‘다시 암에 걸렸습니다’ 팻말을 붙여야 하는 일. 나에게 글쓰기는 정상이라고 구분한 궤도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또다시 증명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암을 정복한 성공 신화의 스토리를 쓰려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것만큼이나 내 인생을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므로. 그래서 아니라고 말하진 못하지만 꼭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이지, 쓰기 자체가 힘들었다고 무게를 싣는다.
전이가 되고 나서 어느 날 글 한편 써야겠다 마음먹고 컴퓨터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치는데 눈물이 흘렀다. 복받치고, 서럽고, 두렵고, 괴로웠다. 내가 지금 누구 좋으라고, 뭐 한다고 아픔을 글로 쓰려는 거지? 글쓰기가 승화가 아니라 꺼낼수록 아픔이 밀려오는 작업으로 느껴져 남편에게 토로했다. ‘나 이제 글 못 쓰겠다. 쓰려고 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힘들어.‘
그동안은 글이 치유의 과정이라고 여기며 덤덤했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과연 치유가 맞는지 의심이 들며 쓰기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흐르는 눈물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글을 쓰기 힘들었던 진짜 이유를 말이다. 나란 사람은 고통을 가시화하는 작업이 감당하기 벅차다는 것을. 언젠가 는 마주해야겠지만 내 그릇은 여기 까지라는 것을.
그래서 블로그에 쓰던 글마저 멈춰버렸다.
치료를 받으며 암의 사이즈가 확 줄어들었다는 소견에 며칠 기쁨을 가지며 지냈다. 시간이 아주 조금 지나자 몸이 또 근질근질했다. 헤어진 연인 SNS 몰래 들어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한 번씩 블로그며 브런치 확인을 했다. 브런치에 발행했던 내 글들에 ‘조회수가 3000을 돌파했습니다’ 이런 알림을 볼 때마다 다시 뿌듯함이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그간 놓쳤던 댓글 알림들도 있었다. ‘우연히 내 글을 봤는데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마음이 아팠다’ 거나 ‘친정 엄마도 암이었는데 공감하며 읽었다’는 댓글을 보며 다시 글을 써볼까 고민도 했다가 접기를 반복했다.
그럴 땐 차라리 조용한 곳에서 사유하는 편이 나았다. 지금은 추워서 중단했지만 날이 좋을 땐 산에 올라 독서를 수시로 했다. 숲에서 책을 읽으면 몸과 정신에 환기가 될뿐더러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다 보면 머릿속에서 또 쓸거리를 구상한다.
’아! 이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오? 좋은 생각인데?‘ 등등.
그렇게 어쩌다 보니 키보드 판에 손을 올려 쓰기를 다시 시도했다. 비록 택시 이야기 연재는 지속할 힘이 부족해서, 능력 밖의 일인 양 제쳐두고 내가 바로바로 쓸 수 있는 익숙한 것들로 채우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난 검사 결과 최악의 상황과 목도했다. 다행히 폐와 목, 쇄골에 있는 암은 작아진 상태로 커지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뇌로 암이 전이가 됐다고. 의사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검사 결과 말에 진료실 안 공기는 한순간에 난기류로 바뀌었다. 그러나 내 웃음은 가볍게 터졌다. 어이가 없어서. 이내 손톱 주변 살들을 뜯고 있는 나와 마주했다. 지금 당장 까슬거린 살을 뜯어내 피를 내는 고통을 느낌으로써 밀려드는 두려움을 억누른다. 자해적인 진통제로 찰나의 괴로움을 잊는 나를 본다.
한편 8개월 만에 겨우 쓰기와 재회했는데 또다시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다. 나에게 쓰기는 외면과 재회 사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방황하는 것이다. 나에게 쓰기는 언제쯤 아사도라 덩컨의 영혼이 깃든 몸짓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