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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이슬 Feb 22. 2024

울어도 돼

이제는 산타할아버지도 좀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숭고한 희생과 사랑을 알려주게 한 내 아이를 온라인상에서는 태명을 사용해 소복이라 일컫는다. 소복이는 동요의 가사를 외워 부르는 한창때를 지나가고 있다. 작년 두 돌을 넘기면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어린이집에서 배운 ‘울면 안 돼’ 노래를 얼마나 힘주어 부르던지.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웠으나 한편으로는 ‘울면 안 돼’ 가사가 귀에 거슬렸다. 산타할아버지는 야속하게도 왜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주는 가. 미숙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배출구 역할을 하는 울음을 어릴 때부터 봉쇄하는 선전 노래로 들렸다.


그러나 다 커서 산타할아버지만 원망할 게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주변 산타들, 그러니까 부모님들의 언어를 듣다 보면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울지 말고! 뚝!” , “착한 사람은 우는 거 아니야.”


소복이의 나이 또래 애들이 다 그렇듯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면 일단 울고 본다. 책을 읽으니 해당 개월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친정 엄마나 시어머니는 소복이가 울면 우는 소리 하지 말라며, 울음을 멈추게 한 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즉각 들어주는 편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의 육아 방식에도 분명한 장점이 있기에 더불어 소복이에게 주 양육자는 친정 엄마라서 부모님들 육아 방식에 날 선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은 마음 한 곳에 울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가끔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께 선물을 받기 위해 소복이는 울지 않으려고 애써야만 했다. 한날은 화가 난 소복이가 울 때 옆에 있던 시어머니가 “소복이. 울면 어떡하나.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안 받고 싶어?”라고 했다.


나는 어쩌면 그 순간 시어머니의 말에 괴로워 울음이 나올 때면 여전히 어색함을 느끼고 눈물을 빨리 훔치려는 가여운 내 모습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눈물의 필요성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고 일단은 시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어머니. 오은영 박사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동요가 ‘울면 안 돼’라고 했어요. 울어야죠.” [고부관계 좋음 : 격양된 톤이 아니니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나는 이어 아이 앞에서 동요를 개사해 불렀다.

“울어도 돼. 울어도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도 서-언물을 주신대요. ~~~~“


소복이는 개사 동요를 냉큼 잘라먹더니 원래 가사로 바꿔 불렀다.

“엄마! 아니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대.”


아이들에게 주입된 학습은 물에 젖은 휴지처럼 흡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며 그날 옥신각신 나는 울어도 돼를, 소복이는 울면 안돼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 이후에도 “우는 소리 하지 말고”가 버릇처럼 나오는 친정엄마의 멘트를 들을 때면 나는 아이 앞에서 웃으면서 울어도 돼를 부른다. 육아 고수가 들으면 잘못된 육아 방식이라고 지적할지라도.




그러던 어제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데려갔다. 열은 떨어질 기세가 없고 설사까지 했다. 단순 감기가 아닌 것 같아 독감, 코로나, 폐렴 검사를 했다. 원인이 나오지 않아 어제는 근처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3일 연속해서 병원을 가니 잘 참던 소복이가 어제는 울었다. 나는 등을 토닥이며 무서우면 울어도 된다고 했다. 엄마도 어릴 때 무섭고 두려우면 울었다고 했다 [선의의 거짓말 :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엄마가 못 울게 했으니 울지 않았을 거지만]. 다른 바이러스 검사를 다시 하는 과정에서 코를 또 찔러야 하니 또 한 번 우는 소복이. 안쓰러워 안아주면서 그럼에도 잘 해냈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무서워서 울음을 토해내고 그럼에도 참아야 할 때 참으면서 성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울음은 함께 해야 한다. 슬플 때만 흘리는 게 아니니까. 두렵고, 힘들고, 괴롭고, 기쁘고, 화나고, 우울하고, 행복하고, 벅찰 때 모든 감정에 울음은 포함된다. 그런데 행위를 제재당하고 내면 의식은 치중하지 않는 비논리로 성장한다. 29개월 아이에게 자연스러운 발달과업 중 하나였던 울음을 점점 없애려고 하는 말들 중에는 울보가 있듯 요즘은 극 F라는 말로 바꿀 수 있으려나. 어찌 됐든 울음이 놀림거리가 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지 않다. 울음이 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자신의 내면 상태를 시원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되니 말이다.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듣기 위해 앉아있던 그때, 소복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울어도 선물 머리맡에 두신대?” 나는 단박에 “그러엄. 당연하지. 우는 아이에게도 선물 주신대.”


이어서 아이는 “엄마. 화날 땐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묻는다. 예상 질문지에 없던 질문. 울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스텝을 묻는다. 빠르게 짱구를 굴려 말했다. “후 하 후 하 심호흡을 세 번 하면 화가 자기네 집으로 도망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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