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은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5일 내내 운동 의지를 불태운다. 주말은 남편과 아이랑 시간을 보내는 것에 에너지를 발휘해야 하므로 평일에 어떻게든 운동을 하는 것이다.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운동이라 알려진 걷기 운동을 하는데 평소 땀과 열이 없는 편이라 중무장을 한 채로 빠르게 걷는다. 돌아와서 모자, 장갑, 외투, 토시 등을 벗으면 땀이 흥건하다.
그러나 걷다 보면 때로는 지루함이 밀려온다. 루틴의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루틴대로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반복 적 행위의 누적은 의식의 무료함을 양산한다. 분명 오리의 위치, 하늘의 빛깔, 구름의 모양, 하천 다리를 지나는 수많은 자동차가 어제와 오늘을 달리 할 텐데 내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 따분해진다. 그럴 땐 조그마한 변화라도 주기 위해 노선을 변경한다. 하천에서 산으로, 산에서 하천으로 장소를 번갈아가면서. 그러나 이번주는 내리 비가 오고 며칠 전 눈이 대폭 내린 바람에 하천으로만 걸었다.
수북한 눈을 푹푹 밟으며 걸었다. 금세 신발 앞코 사이로 물이 들어와 양말이 젖었다. 이전에 나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눈은 이래서 싫다고, 싫은 점만 부각하며 눈이 풍기는 분위기는 소실시켰을 터다. 그러나 처해진 환경, 나이를 먹었다거나 병마로 인해 일을 쉬게 된 여러 사정은 눈이 늘 그대로인 것 같은 자연에 특별한 장식이 되어준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일자로 뻗은 단조로운 가지에 하얀 이중줄로 포인트를 주게 하고 메마른 나뭇잎을 목화솜 같은 예쁜 꽃으로 변신시킨다.
하천을 장식한 눈 덕분에 지겨울 뻔했던 마음이 사그라지며 나는 넘어지지 않는 선에서 다시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멀리 중년의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눈밭에서 다리를 V자 형태를 하고 앉아 셀카를 찍고 있었는데 그 뒤로 커다란 눈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그날 하루 ‘귀엽다’가 인상 깊은 동사로 각인되고, 그것이 우리 소복이가 아닌 중년의 남성에게 쓰일 줄 누가 알았겠는 가. [물론 다른 유형의 귀여움이지만] 나는 눈밭을 성큼성큼 걸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이 눈사람 직접 만드셨어요?” 그 순간 나는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낯선 타인에게 말을 건넬 용기가 어떻게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을까. 그런 나에게 어색함을 느낄 때쯤 그가 말했다. “아! 눈사람 형태는 누가 만들어 놓았고요. 제가 나뭇잎 이런 거 주워다가 눈코입 만들고 제 모자 좀 올려줬어요. “
이번 겨울 지나가며 본 눈사람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눈사람이었기 때문에 [또는 그의 나이와는 대조되는 동심이 부각되었기 때문이었을 지도] 나도 사진을 찍고 싶어 물었다. “저도 사진 한 장 찍어가도 될까요?” 눈사람 앞에 선 내 모습을 찍어주신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며 눈사람만 한 장 남겼다. 반대로 내가 셀카로는 눈사람과 자신을 다 담기 어려웠을 그에게 한 장 찍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훈훈한 마음을 품으며 나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도 역시나 하천을 걸었다. 쌓였던 눈들이 녹아내리기 충분한 날씨였다. 어제 본 눈사람의 상하반신은 두 동강이 나있었고 그건 예측가능한 물리적 사실이었다. 다만 감동과 순수, 사랑, 천진무구 그 자체였던 눈사람이 녹아내리는 모습은 마치 울라프를 연상케 했다.
결국에 녹는 울라프처럼 우리 모두는 죽음을 가까이에 두며 산다. 시간의 순서만 달리할 뿐 불변의 법칙이다. 하늘나라 미지의 세계를 주님을 향해 절실한 마음으로 비칠지라도 현세계에서 영생할 수 없는 건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늘 죽음이 두려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 죽음.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는 사라지고 없듯 한정된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매 순간 인식한다면 사랑은 눈앞에서 반짝일 것이다.
겨울 왕국에서 울라프가 사라질 때 어딘가 슬프긴 했어도 정확한 어떤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날 알았다. 다음 날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의지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을. 그 의미는 무엇으로 답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녹아내릴 걸 아는 울라프가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듯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사랑에 달려 있다. 생의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사람이건 동식물이건 혹은 눈사람이건 지금 이 시간이 지나가는 때에 내가 살아있으므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랑들이다.
“일기일회” [생은 단 한번] 라는 책이 나의 마음을 울렸던 적 있다. 삶이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님이 그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하니까 마음이 비워졌다.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생에 단 한번뿐인 인연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자기 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는 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마라. 그 순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
책을 다 읽고 나서 일상을 영위하다 보면 비워둔 마음에 다시 생만 채워지기 마련이다. 죽음은 회피하고 생을 붙잡아두고 싶은 정신과적 양상으로 변모해 집착을 하면서 불안은 덤으로 달려온다. 그렇게 살고 있던 중에 번뜩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깨우쳐 준 한 중년의 남성 그리고 눈사람. 그날의 하루는 어떤 하루보다 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