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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11. 2024

몽중인(夢中人)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어쩌면 홍콩영화가 첫사랑이었던 수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장국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울컥하는 사람들,
'양조위'의 눈빛만 봐도 심신이 정화되는 사람들,
'주성치'만 생각하면 하루 종일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사람들,
'장만옥'을 떠올리며 괜히 천천히 걷는 사람들,

그런 헤어진 이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홍콩의 거리를 걷고 있다.

  - 주성철, 김영사.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프롤로그' 중에서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는 '방구석 1열'을 종종 보면서 만났던 주성철 기자의 '홍콩 여행' 가이드북로 2010년에 나온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의 전면 개정판이다.


  홍콩이 가진 매력을 홍콩 영화를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을 통해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현재의 홍콩에서 80~90년대 홍콩 영화의 향수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영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만큼 홍콩 영화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있을까! 수많은 홍콩 영화인들을 인터뷰해 온 작가는 직접 홍콩을 여행하며 영화 속에 담겼던 공간들을 그만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난 이 책을 '홍콩 영화' 지침서로 활용하고자 구매했다. 내가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읽는 내내 흘러넘치는 홍콩 영화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다. 작가와 비슷한 연배인 나로서는 그와 비슷한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영화 <화양연화>를 설명하는 대목


  특히 홍콩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화들의 감독들과 배우들에 대한 설명을 할 때마다 나는 밑줄을 그어가며 배우고 있다. 미처 내가 깨닫지 못했던 영화의 함의라든가 제작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면서 나는 영화를 보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중경삼림>은 1995년 추석 즈음 첫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 극장에서 넋을 잃고 내리 세 번을 연달아 본 적이 있다.(중략)

묘하게도 그 위로의 대사는, 각각 다른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금성무와 왕정문이 만나던 순간 “그녀와 나의 거리는 단 0. 01cm였고 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라는 금성무의 내레이션이었다. 정지된 화면에 그 짧은 대사 하나로 완전히 다른 시간과 정서의 에피소드로 ‘바통터치’ 하는 영화의 구조를 보면서, 힘들지만 전혀 다른 내 삶의 에피소드로 점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지금의 시간도 한참 지나고 보면, 기나긴 삶에서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테니까.

    - 책 중 <헤어진 이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다시 만난다> 중에서



영화 <중경삼림>을 설명하는 대목




  얼마 전에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들을 추천하는 중에 이 영화가 눈에 띄었다. 불현듯 이십 대 초반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서글픔과 애처로움 스며들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틈나는 대로 내가 10대, 20대 때 보았던 홍콩영화들을 다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 홍콩 영화만에 담겨 있는 분위기를, 생생히 눈빛이 살아있는 배우들을 회상한다. 나는 그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걸까?


영화 <용형호제>, <영웅본색>, <지존무상>, <첩혈쌍웅>, <천녀유혼>


  할리우드 영화가 서양권 영화의 주류라고 한다면 동양권에선 홍콩을 대표로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홍콩의 영광은 전부 80~90년대에 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홍콩을 영화로 배우고 환상을 쌓아왔다.


  지금은 K-컬처의 영향력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확산되고 있다는 뿌듯함을 지니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홍콩영화가 할리우드와 함께 한국에서 호각세를 이루고 있었다. 주윤발, 장국영 같은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CF를 찍거나 공연을 감상했다. 그때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 시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천장지구>, <동방불패>, <황비홍>, <첨밀밀>, <쿵푸허슬>


   성룡의 <용형호제>와 주윤발의 <영웅본색>으로 시작해 <천녀유혼>, <지존무상>, <천장지구>, <황비홍>, <동방불패>, <패왕별희>, <중경삼림>, <첨밀밀>, <쿵푸허슬>에서 <화양연화>까지 스크린 속 홍콩은 마치 별천지 같았다. 그곳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허용되는 딴 세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영원히 아시아의 별일 것 같았던 홍콩 영화가 90년대 말부터 서서히 몰락해 갔다. 언제부턴가 출연 배우의 유명세를 믿고 본 홍콩 영화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흥행에 실패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그나마 개봉영화도 뜸해졌다. 그렇게 홍콩 영화는 우리들의 극장가에서 조용히 멀어져 갔다.  


  많은 언론이나 영화 평론가들이 언급한 홍콩 영화의 몰락 원인은 대충 이렇다. 그 근본적인 대답은 바로 1997년 ‘홍콩 반환’이었는데, 이를 기폭한 것은 1989년 6월 4일에 터진 '천안문 사태'였다.


  지금껏 안일한 낙관론 속에서 살아가던 홍콩인들은 천안문 사태를 보면서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고,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일대 공황이 들이닥쳤다. 미래가 심각하게 불투명해진 홍콩영화 산업에 급속한 투자 위축이 발생했고 이는 곧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범죄조직 '삼합회'와 그에 항의하는 홍콩 배우들


  1989년 이후 소위 ‘양지(陽地)의 투자’가 얼어붙으면서 어디까지나 음지(陰地)에 머물러 있던 ‘삼합회(三合會)’ 등 범죄조직의 영향력이 훨씬 강력해졌다. 당시 홍콩에서 영화 제작을 컨트롤해 극장에 돈을 대는 측과 해당 영화의 불법복제 CD를 만들어 파는 측은 모두 삼합회 등 범죄조직이었다


  그런 암울한 환경 속에서 홍콩 누아르의 전설이었던 오우삼 감독이 할리우드 진출의 물꼬를 텄고 많은 감독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타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룡, 주윤발, 이연걸, 양자경, 홍금보 등 스타들이 계속해서 홍콩영화계를 뒤로하고 할리우드 진출에 나섰다.


  그렇게 관객을 끌어모을 스타도 없고 콘텐츠를 제대로 만들어줄 감독 등 제작인력도 죄다 빠져나가 버리니 관객들의 외면은 당연해졌다. 게다가 중국으로 귀속 후에는 소재 제약과 검열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과거처럼 홍콩영화만이 갖고 있던 독특한 색깔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장국영도, 홍콩도 이젠 모두 찬란했던 역사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상대의 위기가 나에게는 기회가 된다고 했던가. 때마침 우리나라는 90년대 말부터 한류라는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는 영화산업에도 온기를 가져와 <접속(1997)>, <쉬리(1999)> 같은 명작이 나오면서 서서히 자생력을 키워갔다.


  지금이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는 K-무비로 우뚝 서 있지만, 그건 그거고 그 당시 홍콩 영화에 대한 그리움은 별개이다.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홍콩의 자유와 낭만을 동경했었다.  


  80년대의 홍콩 영화, 반환을 앞둔 세기말의 홍콩 영화, 반환 직후 21세기를 맞이하는 홍콩 영화의 독특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더 훌륭한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해도 그 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 <무간도> 3부작


  어제까지 해서 두기봉 감독의 <무간도> 3부작을 마무리지었다. 우리나라 영화 <신세계> 각종 범죄 조직 영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전설적인 걸작이다. 양가위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는 배우 양조위가 무간도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열연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넷플릭스]에 있는 양가위 감독 영화들은 다 보았지만, <흑사회> 시리즈도 봐야 하고 '주성치'의 B급 감성 코미디도  계획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회상에 젖는 건 젊은 시절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나는 '꿈꾸는 자(夢中人*)'인가? 아마 꿈이 아니라 '추억'이겠지.


  러닝 차림의 장국영이 추던 맘보를 떠올리하모니카 소리가 아련한 영화 <영웅본색> OST '당년정(當年情)'를 연속해서 듣는 것은 소중한 선물을 받는 듯한 설렘이자 그리움이다.


  영화도 늙고 그 영화를 찍던 배우도 늙고 그 배우를 좋아했던 나도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당시 내가 경험했던 그 영화의 즐거움, 환상, 그리고 서글픔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서 젊음으로 살아있을 것이다.



*몽중인(夢中人):  영화 <중경삼림>에서 독특한 매력으로 팬들을 사로잡은 배우 왕페이(왕정문)가    아일랜드 혼성밴드 크랜베리스의 원곡 Dreams'을 중국어로 직접 부른 노래

영화 <중경삼림>의 '왕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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