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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선빵주의

외모라는 벽 너머의 진심

by 태현

#표지 그림: 마르크 샤갈 <신부>. 1915.

(영화 '노팅힐'에서 선물로 등장한다)




싸움은 "선빵"으로 끝나는 거야. 기선 제압이지.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 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중략)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누구는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누구는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은 그렇게 훅 들어온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다.


-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작가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1999년을 배경으로, 주인공 '나'가 80년대 중반의 첫사랑을 회상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여주인공은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외모로 평가받는 고통 속에 살아왔다. “추하다”는 낙인은 단순한 외적인 평가를 넘어서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벽을 만들게 했다.래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고 느낀다.


남주인공은 그녀의 외모를 넘어선 내면의 진심을 사랑한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외모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자신 내면에 자리한 상처로 인해 남주인공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슬픈 결말로 끝난다.




세상은 외모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기 일쑤다. 예쁘면 친절할 것 같고, 잘생기면 능력 있을 것 같으며, 평범하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곤 한다.


외모는 사람 사이에 무언의 기대와 두려움을 만든다. 너무 아름다우면 다가가기 어렵고, 너무 평범하면 쉽게 잊히며, 너무 다르면 틀린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인지’보다 ‘어떻게 생겼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주말에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 『노팅힐』은 우리가 외모에 기대는 감정의 허상을 조용히 흔들어 준다.


영화 '노팅힐' 포스터


20여 년이 훌쩍 지난 영화(1999) 임에도 다시 보면서 행복했다. '휴 그랜트'의 목소리에 반하고 '줄리아 로버츠'의 미소에 또 반했다. 요즘 영화와는 달리 꽉 닫힌 해피엔딩이 오히려 신선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사랑하는 명작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여주인공 '안나 스콧'(줄리아 로버츠 분)은 세계적인 영화배우다. 그녀는 화면 속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다. 우윳빛 피부와 완벽한 미소, 모두의 시선을 끄는 외모.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그녀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철저히 고립시키고 있었음을 우리는 영화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녀가 남주인공 '윌리엄 대커'(휴 그랜트 분)에게 진심을 말하던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가 가장 깊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 I'm also just a girl, standing in front of a boy, asking him to love her.”
("나 또한 한 남자 앞에 서서 그에게 사랑을 청하는 소녀일 뿐이에요.")


스콧이 대커에게 지난 일을 사과하면서 사랑을 고백한다.


그토록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고백의 순간에 보여주는 말은 놀라울 만큼 평범하고 담백하다. 그녀는 세상의 수많은 찬사와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저 누군가의 관심을 바라는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예쁘니까 상처받지 않을 거야’, ‘화려하니까 외롭지 않을 거야’라는 오해 속에서 진짜 마음은 점점 묻혀 간다. 그렇기에 스콧의 대사는 단지 고백의 말이 아니라, 외모로 인해 만들어진 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선언처럼 들린다.


“당신이 보는 겉모습 말고, 내 안을 봐주세요.”




그러나 대커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미 스콧에게 한 번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또다시 자신을 상처 입힐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스타이고, 자신은 그냥 책방 주인이니까.


그는 '나는 결국 그녀 세계에서 이방인일 뿐'이라는 열등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고 믿는 순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나와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렇게 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나는가 안타까워할 때쯤.


뒤늦게 자신의 진심을 확인하고 실수를 깨달은 대커가 스콧의 마지막 기자회견장으로 달려간다. 영원히 영국을 떠나고자 하는 사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필사적으로 회견장에 들어간 그는 여느 기자인양 그녀에게 질문을 한다.


대커 : 스콧 양, 이런 상황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들 둘이서 좋은 친구 이상이 되는...

스콧 : 그러길 바랐지만 안 됐네요. 틀린 것 같아요.

대커 : 하지만 만일... (중략) 만일 그 사람이... (중략) 이게 가능할까요? 만일... 대커 씨가 자신이 '정신 나간 바보'였다는 걸 깨닫고 무릎을 꿇고 당신에게 재고를 간청하면 당신은 다시 생각해 줄 건가요.

스콧 : (잠시 고민하는 시간이 흐르고) 예, 물론이죠. 그러고 말고요.


두 사람의 대화가 대커의 사랑고백이었음을 깨달은 기자들의 플래시가 두 사람을 향해 쉴새없이 터진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안나는 조용히 “Yes.”라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대화가 대커의 사랑고백이었음을 깨달은 기자들의 플래시가 두 사람을 향해 쉴 새 없이 터진다.


그 순간 울려 퍼지는 '엘비스 코스텔로'가 부른 노래 "She"가 화면 가득 퍼지면서 보는 이들의 마음에 진정으로 사랑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이 장면은 외모라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오히려 그 너머의 진심을 드러낸다. 화려함 속에 가려졌던 두 사람의 마음이,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곤 한다. 어떤 날은 괜찮아 보이고, 또 어느 날은 괜히 주눅 들곤 한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날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외모보다 훨씬 오래 남는 것이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는다. 편하게 웃게 해주는 사람,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 서툴러도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마음에 오래 남고, 결국 관계를 이어가게 만든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고백이나 극적인 장면은 없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소소한 방식으로 진심이 오간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겉모습보다 훨씬 더 깊 오래 기억되고 마음에 남 것이다.


영화 '노팅힐' 마지막 장면. 공원에서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모습. 아마 태중의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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