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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고 난 뒤

by 태현

#표지 그림: 뭉크, <죽음의 침대>, 1895.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해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 '프랭크 허버트' <듄 시리즈(전 6권)>에 나오는 "베네게세리트 기도문" 인용


내가 제일 아끼는 책 <듄>에서 자주 등장하는 '베네게세리트의 기도문'이다. 주인공을 포함해 소설 속 비밀결사조직인 베네게세리트 출신 인물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될 때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닥친 어려움 속에서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


나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뭔가 걱정이 있을 때면 듄 시리즈를 펼쳐 본다. 책은 많은 생각과 고민을 나에게 던져 준다. 이미 전반적인 서사는 꿰뚫고 있기에 1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한 권을 골라 임의로 펼쳐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 내 상황에 맞게 좋은 조언을 해주는 문장을 만난다.




이 기도문은 단지 허구의 문학 속 문장만이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이와 비슷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우리 내면에서 탄생하여 의식을 지배하는 아주 소름 끼치는 존재이다.


치명적인 병에 걸릴까 봐 두렵다. 해고될까 봐, 지금보다 더 가난해질까 봐, 사랑이 떠나갈까 봐. 이처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오는 감정이다. 두려움이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 상실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때 병으로 고생했거나, 실직을 했거나, 실연을 당했던 사람은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도 미래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슬픔에 빠진다.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감정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발생한다. 그렇게 두려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를 좀먹는 괴물이 된다.


소설 <듄> 속 주인공 폴의 어머니인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의 얼굴에 있는 타투는 베네 게세리트가 두려움에 맞설 때 읊는 기도문으로 새겨져 있다.(영화 듄의 한 장면)





‘후회’라는 감정을 판단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후회에는 모든 불행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즉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자신이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빠질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행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화석화되어 버린 내 과거에 대한 후회




지난 주말에 딸애와 식탁에 마주 앉아 빙수를 먹었다. 오랜만에 둘만의 짧지만 진솔한 시간을 가졌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라 그런지 같이 식사 한 번 같이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바쁜 존재가 되었다.


집에 같이 있더라도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기 일쑤이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 시절 그즈음이 막 자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감탄하면서도 아직은 세상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과도기적 시기였다고 할까.


오랜만에 이뤄진 부녀간의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나는 딸애의 심기를 살펴가며 내가 가진 딸애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학교에서 휴대폰으로 보낸 '주간학습안내'를 떠올리며 화제를 이어갔다.


"내일 회장(반장) 선거 있지 않아?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매일 학교에서 급식사진과 전달사항을 보내 줘. 그래서 이번에도 회장 선거 나갈 거야?"


"에바, 무슨 소리래. 난 앞으로 절대 그런 거 안 할 거야. 내가 작년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 흑역사의 90%는 다 그때 일이야. 아!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작년 2학기 회장 선거 전으로 가서 모든 걸 바로 잡을 텐데. 정말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어느 초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반장 선거 모습


나는 딸애가 손사래를 치면서 정색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슬며시 침울한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는 과거 언제쯤으로 돌아가야 내 어지러운 삶의 흔적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바로잡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날 밤, 나는 딸애의 한 마디를 오래 곱씹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걸 바로잡고 싶다.”


그 말은 마치 내 마음속 깊은 바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조금만 더 신중히 들여다봤더라면, 조금만 더 마음을 다스렸다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꾸 떠오르는 회환의 그림자는 그리 길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두려움>의 손아귀에 놓여 언제 어떻게 올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두려움>의 손아귀에 놓여져 언제 어떻게 올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두려움을 지나가게 두는 것. 두려움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고, 그저 그것이 내 안을 통과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명징한 지혜인가.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 애쓰다가 오히려 더 움츠러들고,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러나 두려움이 통과하도록 허락한다면, 끝내 남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두려워해도 괜찮아. 하지만 그 두려움이 너 대신결정하게 두어서는 안 돼.”


삶은 계속해서 새로운 선택의 연속이고, 때로는 그 선택 앞에서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믿고 싶다.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는 결국, 두려움을 통과한 바로 '나' 자신뿐이니까.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는 결국, 두려움을 통과한 바로 '나' 자신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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