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을 잃다

사사소소 이야기

by 무우


장대비 땅을 때렸다. 시끄러웠다. 숨 죽어 있던 흙내가 올라 코를 찔렀다. 하늘이 검었다. 아침까지 섰던 접시꽃 대가 고꾸라졌다. 낮게 깔린 구름이 산을 넘었다. 쇠 젓가락으로 찢은 부추전에 막걸리가 당기는 날이다.

동동주에서 누룩 맛이 안 났다. `맛있다`라는 주문을 걸었다. 자그마한 여자애가 모둠전 채반을 가져왔다. 모둠전들이 여러 가지 꽃을 모은 것처럼 화려했다. 취한 것도 아닌데 눈이 어지러웠다. 부추전 찢기 미안한 마음에 눈으로만 먹었다. 막걸리로 입안을 가셨다. 잠깐의 묵념을 가진 뒤 부추전을 찢었다. 가벼운 기름이 입술을 덮었다. 간이 심심했고 부추향도 안 났다.

막걸리 한 모금을 넘겼다. 할머니가 만들었던 동동주 사카린이 맛이 났다. 억지로 떠 올린 옛 기억은 막걸리 잔의 부딪침에 침몰했다. 주홍색의 김치전을 베어 물었다. 부뚜막에서 먹었던 묵은지 맛이 없었다. 입 맛이 간사한 건지 미각을 잃은 것인지 막걸리 목 넘김의 운율은 안 났다.

막걸리에 부추전을 먹던 젊은 날의 추억을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소변을 두 번이나 보는 수고로움만 찾아왔다. 꼿꼿했던 몸도 양은 주전자에게 자꾸 절을 했다. 창 밖으로 장대비가 또 쏟아졌다. 주전자는 막걸리를 계속 날랐고 나는 주전자에게 계속 인사를 했다. 찌그러진 주전자는 양은 잔에 막걸리를 쏟았다. 주전자는 비워졌고 내 배는 터질 듯 불렀다.

막걸리의 시큼한 냄새도 전 집의 꼬신내도 모두 사라졌다. 문 밖 간판들의 불빛이 화려했다. 나도 주전자와 인사를 끝내고 일어섰다. 돌아본 테이블에는 흩어진 쇠젓가락과 양은 잔만 아무렇게 놓여있었다. 비가 완전히 그쳤다. 간판들의 불빛이 더 화려했고 나는 어디로 갈지 몰랐다. 밤의 화려함에 길을 잃었다. 그냥 걸었다.

오래된 맥주·양주 간판이 걸린 술집에 갔다. 간판이 작았지만 발걸음이 기억하는 것으로 봐서 서너 번 온 것 같았다. 화장이 짙은 마담에게 인사를 했다. 이 비에 어떻게 왔는지 물었다. `사장이 예뻐서 왔다`는 농담을 건넸다. 독특한 웃음소리를 냈다. 맥주를 시켰다. 사기그릇에 마른안주를 내왔다. 여백이 있는 담음이었다. 한잔 달라 내미는 손이 고왔다. 거품이 잔을 살짝 넘었다. 상관없는 듯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통성명을 했다. 목소리가 공간의 여백을 찾아갔다. 두 잔을 마시고 일어섰다. `가시냐` 인사에 `또 온다` 답했다.

소나기가 더위를 씻어 갔는지 밤공기가 상쾌했다. 나를 태울 택시는 오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처진 몸을 견뎠다. 간판에 쳐진 거미줄에 제법 큰 날벌레 붙었다. 탈출하려 애를 썼다. 더 조여지는 거미줄에 나방이 힘을 잃었다. 퍼덕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내 처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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