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중일기
1597년 7월 21일 (경술, 9월 2일) 맑다.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본업에 많이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아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이 적을 보고 먼저 달아나서 이렇게 되었다"라고 한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함께 이야기했다. 오전 세 시가 지나도록 전혀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1597년 7월 22일 (신해, 9월 3일)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날이 늦어서 남해현감 박대남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하므로 잤다.
1597녀 7월 23일 (임자, 9월 4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공문을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부치어 먼저 원수부에 갖다 주게 하고 곧 뒤따라 떠나 십오리원(곤명면 봉계리)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깐 쉬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도 왔다.
1597년 7월 25일 (갑인, 9월 6일) 맑다. 종사관 황여일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배수립과 이곳 주인 이홍훈이 와서 봤다. 남해현령 박대남이 사람을 보내어 내일 들어오겠다고 전했다.
1597년 7월 26일 (을묘, 9월 7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전개산성 아래에 있는 송정(옥종면 문암리)으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과 진주목사와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1597년 7월 27일 (병진, 9월 8일) 종일 비 오다.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래의 집(하동군 수곡면 원계리)으로 옮겨가 머물렀다. - 난중일기 중에서
2. 다솔사 가는 길
2010년 5월 9일 (일요일) 하늘이 맑다.
"오늘 산악회에서 이명산을 거쳐 봉명산을 간다네"
"애들하고 못 놀아 줘서 미안해"
곤히 자는 아내를 깨웠다. 어제 아이들과 함께 시부모님을 뵙고 와서 그런지 일어나질 않았다. 등산복과 배낭을 챙겼다. 언제 일어났는지 아내가 부엌에서 녹차 한 병을 내왔다. 장모님과 동년배인 사촌 처형의 사돈댁에서 보낸 것이고 우전차라고 했다.
"곡우 무렵의 첫 찻잎을 따고 덖어서 만든 것이라 비싼 차일 텐데"
"처형 덕분에 내 입이 호사다"
아내가 허탕하게 웃으며 따라나섰다.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수정김밥 2줄과 물 한 병을 사서 배낭에 넣어주었다. 하동군 북천의 이명산을 거쳐 사천 곤명의 봉명산을 둘러본 뒤 다솔사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피곤한 심신을 달랠 참으로 동참한 산행인데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다섯 대의 관광버스가 길가에 주차하고 있었다. 마지막 버스에 올라 아는 지인과 인사를 했다. 뒤쪽에서 들리는 패설에 웃음이 났다.
'40대 남편이 부인한테 어디 가냐? 물으면 눈탱이 밤탱이 되고, 50대 남편이 부인한테 어디 갔다 오냐? 물으면 눈탱이 밤탱이 되고, 60대 영감이 아침밥 먹자고 깨우면 일찍 깨운다고 눈탱이 밤탱이 되고, 70대 영감이 아침에 일어나면 눈탱이 밤탱이 된다. 그냥 계속 편안히(영원히) 자지 일어났다고'
중년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가 그칠 줄을 몰랐다. 버스가 이명산 초입에 멈추고 일행을 내렸다. 앞섰던 중년여성의 걸쭉한 입담에 실소가 터졌다. 임원 한 명이 입은 등산바지에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달라붙은 등산복 차림으로 일행을 안내하다가 여성의 레이더에 걸린 것이다. 쌀 한 포대보다 조금 더 나가는 몸매를 자랑한다고 타박을 했다. 웃는 이들을 뒤로하고 산행표지판을 살핀 후 산을 올랐다.
땀이 났다. 30분을 오르니 시루떡을 닮은 바위가 앞을 막았다. 요상한 바위였다. 뒤돌아 올라가니 동쪽 해 오르는 방향을 보고 있는 석불상이 나타났다. 안내판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마애석조여래좌상(경남유형문화재 39호)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애불을 한참 올려봤다. 마멸이 심한 얼굴이라 온화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합장을 드리고 다시 이명산을 올랐다. 산길이 쉬웠다.
이명산 정상에 세워진 정자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으로 백운산과 금오산, 사천만, 강진만, 남해 섬이 눈에 들었다. 북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가까웠다. 아내가 챙겨준 녹차 한 모금을 마시고 햇볕이 박히는 남해안을 조망하였다.
내려가는 이명산(580m)은 경사가 심했다. 이명산과 봉명산 사이의 등산로에 위치한 철탑 밑에서 지인이 준 막걸리 한 사발을 마셨다. 누룩맛이 혀를 파고들었다. 막걸리가 허기를 달랬다. 편백숲이 울창한 등산로를 따라 봉명산(408m)을 올랐다. 군립공원이라 그런지 등산로가 좋았다. 가족 산행객들이 많았다.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음이 아쉬웠다. 숲이 빽빽해 하늘을 보기가 힘들었다. 은은한 솔향이 몸을 감쌌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솔향이 진동했다. 수백 년 된 노송의 자태에 시선을 빼앗겼다. 산을 오르기 힘들었다.
봉명산 정상에도 2층의 정자가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거나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수백 년 전설을 간직한 적송의 운치만 감상할 수 있었다. 적송 향에 취한 등산객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아 주변이 장마당이었다. 우전차 향에 취하고 적송 향에 취하니 진주 동쪽 월아산 달오를 때까지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밀려드는 산행객의 아우성에 몸을 일으켰다. 산길을 내려가니 다솔사의 지붕이 보였다. 절의 뒤편에서 경내로 들어섰다.
봉명산 다솔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었다. 대웅전 대신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부처님이 안 계셨다. 작은 와불만 볼 수 있었다. 와불 뒤의 통창으로 부처님 사리탑이 보였다. 와불에 대하여 합장을 하고 적멸보궁 뒤의 부처님 사리함을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았다.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다.
다솔사 경내에는 수백 년 세월의 고비를 넘고 있는 고사목이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고사목 안에 들어가 하늘을 보라고 했다. 하늘이 보이면 마음이 수양된 것이니 복을 얻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동자승 두 분이 가부좌를 틀고 계셔서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만 넣고 위를 보았다. 우둔한 나에게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1879~1944)과 소설가 김동리(1913~1995) 선생이 머물렀던 절집의 뒤편 산자락에는 너른 차밭이 펼쳐져 있었고 순천의 선암사에서 본 것과 같은 것 같았다.
산사의 입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없었다. 궁금했다. 고종임금이 세운 어금혈봉표 바위의 각자가 천왕문을 대신하고 장군바위가 사천왕을 대신한다고 한 분이 말했다. 사찰의 일주문 역할을 하는 어금혈봉표 바위는 명당 터에 세도가들이 묘를 쓰는 것을 막고자 고종임금이 어명으로 세운 금표였다. 풍수지리가 좋은 봉명산에 무덤이 보이지 않는 이유였다.
다솔사 어금혈봉표를 뒤에 두고 하산을 했다. 원시림인 송림길은 고찰과 어우러져 첩첩산중이었다.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다솔사 버스 주차장에서 산행을 함께 한 일행들과 헤어졌다. 백의종군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논밭뚝의 들꽃을 보기 위해 떠나가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 한 낮이라 볕이 뜨거웠다. 주차장 끝에서 촌노 한분이 고사리와 두릅 좌판을 펼치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솔사 고사목 같았다. 촌노가 펼친 좌판의 고사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할머니와 연배가 비슷한 상춘객 노인이 다가왔다. 국산 고사리가 맞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 얼핏 젊은 내가 봐도 생물 고사리건만 할아버지는 계속 의심의 눈초리였다. 생물 고사리를 꺾을 때 묻어나는 진액이 손가락 마디마디 주름과 닳아버린 손톱 밑에 꺼멓게 끼인 것으로 봐서는 직접 꺾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리쬐는 볕이 무거워 상춘객 어르신과 촌노의 흥정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3. 백의종군길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백의종군길 중 사천시 곤양면과 곤명면을 잇는 58번 지방도는 산청과 합천의 내륙으로 가는 길이다. 백의 종군로를 걸어보고자 나는 곤명면 용산리(다솔사 초입)에서 시작하여 봉계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5월 땡볕이 뜨거웠다. 가끔 지나가는 달콤한 딸기 향에 코가 벌름거렸다. 비닐하우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딸기 향에 걸음이 멈췄다. 딸기향을 머금은 바람에 청보리 애기 이삭이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했고
청보리 살랑거릴 때 농사를 준비하는 무논에서 흙내가 올라왔다.
도원수 권율장군의 재가를 받아 수군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 남해안 수색에 나섰던 길, 그 백의종군의 길은 무너진 조선 수군의 전열과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임을 알기에 걷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군이 걸으며 보았던 민초들의 궁핍한 삶에서 두 번 다시는 패할 수 없다는 강한 결의와 그의 애끓는 절박함은 눈과 몸을 상하게 하였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칠천량 전투 패전 소식과 함께 희망의 불씨 한 줌 보이지 않는 암흑천지에도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희망의 울부짖음을 임금에게 고했던 길이다.
하지만 습식사우나 속을 2시간 남짓 걷자 이 시골길을 왜 걷고 있는지 조차 잊었다. 역사적, 도덕적 인격을 조금이나마 배우고자 시작한 걸음이었건만 나 자신에게 왜 걷는 거냐라는 질문에 답도 할 수 없었다. 시시껄렁하게 살아온 내 생의 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작은 허영심은 땡볕에 주저앉은 채소 마냥 풀이 죽었다.
두 시간을 넘게 걸어 도착한 목적지, 곤명면 봉계리 십오리원(현재 지명 : 원전)은 장군이 남해안을 정찰하고 합천 도원수부로 돌아가는 길에 땀을 식히며 흘러가는 초량천을 바라보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곳이다. 한낮 땡볕에 타는 목, 무거운 발걸음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옥고를 치른 후 미투리 한족으로 먼 길을 걷고 또 걸었을 그분에 비하면 나의 이런 불평은 몰염치였다.
4. 삼도수군통제사 교지
[왕은 이르노라. 오호라! 국가가 의지할 곳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려 흉악한 칼날이 다시 성하여 마침내 삼도의 군사를 한 번 싸움에서 모두 잃었으니 이후로 바다 가까운 고을은 누가 다시 막아 낼 것인가? 한산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중략
이제 각별히 어두움에서 경을 일으키고,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천거하여 겸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노니, 경은 지금 나아가 군사를 모아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성을 일시에 떨치면 이미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고, 적 또한 우리가 준비가 있음을 듣고 감히 다시 방자하게 창궐하지 못할 것이니 경은 이를 힘쓸 지어다.
- 중략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굳건히 하여, 나라 건져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길 바라며, 이제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알지어다. - 충무공전서 중]
5. 에필로그
정유재란 전쟁으로 발현된 백의종군길은 이순신 장군 자신에게 처해졌던 치욕과 모욕의 길이 아니라 그 어떤 조건도 버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걸었던 길이다. 나 같은 범인이 결코 감내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이 번 나의 백의종군길 유람도 지친 심신을 단련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땀 흘릴 가치가 충분하다고 자평한다. 다만 나 자신의 건강과 휴식만을 위한 것이었기에 이기적 마음은 강물에 흘려보낸다. 장군께서 말을 쉬게 한 십오리원의 풀 한 포기, 앉았던 자리의 바위도 그대로이고 초량천 강물도 변함없이 흐른다. 사냥에 열중하는 수중보 위의 왜가리도 그 어미의 어미, 어미로부터 계속 살고 있을 것이다. 녹차 한 사발 들이키고 다솔사 부처님 진신 사리탑을 돌며 부모님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봄날의 휴식을 즐기기에 좋은 트레킹이었다.
나의 다음 행보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설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