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이 쇠퇴되었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라이브 펍이나 라이브 카페 등 공연을 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았다.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찾고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한 흥미로운 알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라이브연주자 모집. 월급 협의. 면접 있음”
번화가에 위치한 건물 꼭대기 전층을 리모델링한 라이브 펍이었는데 이름만 펍이지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호프집과 더 닮아 있는 곳이었다. 전무님이란 직함을 단 나이 지긋하신 분이 자리를 안내하고 대뜸 집이 어딘지를 물었다. 일 끝나는 시간이 자정이라 집에 가는 길이 걱정되어 물으신 것이다. 그리고 간단히 피아노 연주와 노래를 확인하고서는 바로 페이 협상에 들어가셨다,
“혹시 캐셔도 맡을 생각 없나? 같이 하면 120만 원에 월급을 맞춰줄 수 있는데.”
당시 120만 원이라면 현재 가치로 회사원들의 월급에 가까운 수치의 돈이었고 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매일 오후 4시에 출근해 포스정리를 하고 쉬는 시간에는 계산대 구석에 앉아 화성학문제를 풀었다. 그러다 5시가 되면 1시간 정도 라이브 공연을 하고 내려와 마감할 때까지 캐셔로 근무하는 루틴을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칠 만도 했는데 꿈이 있는 사람에게 젊음의 시간은 무엇보다 귀했기에 참으로 열심히 달렸다 싶다.
내가 연주하는 시간이 오후 5 시인 것은 가장 손님이 없을 시간으로 오프닝 전 관객몰이 정도의 무대로 생각하면 되었다. 아주 드물게 그 시간대에 방문하는 손님들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나에게 팁을 건네거나 음료수를 선사하는 멋쟁이 손님들도 있었다. 내가 자주 부르던 레퍼토리 곡은 주 고객층인 50-60대를 겨냥해 만들었다. 타이타닉 주제가인 My heart will go on 같은 올드 팝송이나 휘트니휴스턴, 머라이커 캐리 노래들을 가장 많이 불렀다. 가끔은 트렌디한 노래도 부르고 싶어 유행하는 가요를 부르기도 했지만 박수소리가 확연이 차이가 나는 반응이었다. 역시 어르신들 입맛에는 오래된 노래들이 잘 맞는다.
일을 하면서 힘들지만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술 취한 손님들로 인한 끝없는 에피소드들과 젊은 아르바이트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좌충우돌 러브라인 스토리, 일이 끝나면 우리끼리 모여 술 한잔 기울이며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를 위로하던 시간들이었다. 1년여의 시간 동안 라이브가수 생활을 하며 나에게 도움이 된 건 분명하다. 나는 그 해에 보컬 입시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장 안에서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줄게 된 것은 아마도 매일 공연해야 하는 생계형 가수로서 훈련된 결과일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