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씨. 이름처럼 낭만파인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급한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요?
여름은 아직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연신 닦아내며 여름은 찡그린듯 웃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저 진짜 오후 반차 못내요. 내일까지 보고해야 할 업무가 꽤 된다구요. 점심도 간단하게 먹고 일하려 했는데..진짜 여름씨..니까 나온거에요. 무슨 일이에요? 싱거운 얘기면 정말 저 여름씨 당분간 안볼지도 몰라요. (웃음)
어휴. 제가 웬만하면 다음에 보자하죠. 정말 이 감흥을 잊고 싶지 않았어요. 가장 먼저 겨울씨에게 말하고 싶었다구요.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아니 그런다한들 또 야근한다고 할 거 아닙니까? 주말이요? 알 수 없죠. 겨울씨 집에 일이 있거나 다른 사람 약속 있어 못볼 수도 있고..아니 다 떠나서 너무 보고 싶었어요. 커피 한 잔이면 되요. 그 정도 시간이면..
겨울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침묵했다. 듣고프니 말해보라는 신호같았다.
겨울씨.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액자형 구조의 소설 배운적 있죠? 왜 있잖아요. 액자안의 그림을 보는 이를 또 다른 이가 보는 것처럼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있는..그쵸. 네 네 맞아요.
제가 어제 꿈을 꿨거든요. 근데 꿈속의 저는 또 꿈을 꾸고 있는거에요. 그 꿈인즉 저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거에요. 아..꿈에서..아니 꿈의 꿈에서..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 정리가 안되네요. (웃음) 여튼 꿈의 꿈속의 저는 억울함에 구천을 떠도는데 저승사자가 말하길
네 죽음이 억울한 면이 있으니 환생시켜 세상과 이별할 시간을 주겠다. 다만 돈 돈 돈 입에 달고 산 네 인생을 측은히 여겨 벌어놓은 네 돈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려한다. 지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1억씩이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길..
아니 일주일에 일억이라니..너무 하는 거..말을 끝맺기도 전에 저승사자는 눈앞에서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꿈에서 깬거에요. 액자밖의, 그러나 여전히 꿈속인..제가..꿈을 깬거죠. 이해했죠? (웃음) 꿈에서 깬 저는 무슨 이런 개꿈이 있나.. 기분 안좋은 상태로 출근을 했는데 사무실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여서 주식 얘기를 하더군요. 뭔 소리인가 들어봤는데 유망한 기업이 갑자기 어려워졌다나..그 기업 제가 큰 돈 투자했던 곳이거든요. 황급히 주식 계좌를 열어봤는데 하한가더군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하한가..주식이 팔리지도 않았어요. 얼마나 손해봤나 계산해보니 일주일에 1억 꼴이었어요. 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꿈이 아니었던 거에요. 저는 잠깐 환생한거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거죠. 주식이 깡통이 되면서 신용대출이 문제가 됐어요.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갔는데 계속 유찰이 되더군요. 형편없는 가격까지 내려가는데 뭘 어찌 해볼수가 없는거에요.
목이 탔는지 여름은 커피를 냉수처럼 들이켰다. 경매란게 몇 개월, 길게는 해를 넘기는 긴 과정이지만 꿈에선들 그런걸 따지겠는가..
겨울은 웃으며 한마디 했다.
여름씨는 집도 절도 없는데 꿈에서는 자산가로 나왔나요?
겨울씨. 현실만 놓고보면 제가 2주나 버티겠습니까. 그래도 스토리가 가능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할테니..꿈이잖아요. (웃음)
여름은 말을 이었다.
처음엔 큰 돈을 벌어서 목숨을 연장하고자 했어요. 미친 짓이었죠. 갖고 있는 재산을 팔아서 암호화폐 등을 샀어요. 하지만 인내심이 없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투자는 투기나 다름없었고 큰 손실로 목숨줄만 짧아졌죠. 회사에서 수당 나오는 일을 도맡고 퇴근 후 투잡, 쓰리잡 했는데 어느 순간 뭐하는 짓인가 싶더군요. 버는 속도가 사라지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일주일에 1억을 벌 수 있겠어요. 설령 그럴 수 있다해도 전 일만하며 일주일 지내는건데 그게 사는건가 싶은거죠. 돈에 메인 인생. 식물인간과 다를 게 있을까요,.
겨울은 커피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얼음이 거의 녹았다. 여름의 이야기는 커피 한 모금도 잊게 할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핸드폰 시간을 눈으로 쫒긴 했지만.
그래서요? 여름씨. 그래서 어떻게 됐죠? 설마 결말 없이 꿈에서 깬 건 아니죠?
들어봐요. 저는 당장 회사를 박차고 나와 몇 주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했어요. 이젠 시간이 진짜 돈이었어요. 아니 돈은 의미가 없었죠. 시간만이 남았고..왜 이런게 내 운명일까 한탄하는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었죠. 원망이며 분노며 다 필요없고 그저 이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돈도 그 사람들을 돕는데 쓰고 싶고..물론 제 생명은 그만큼 줄겠지만 그들의 웃음을 보는게 너무 행복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몇 주가 가고..이제 진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때..
겨울은 여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여름은 그런 겨울의 시선이 부담이었는지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피식 웃고는..
그 때..눈을 떴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봐요..(웃음)
아니 겨울씨. 끝이 좀 허무하다는 거 맞아요. 하지만 사실을 얘기해야죠. 겨울씨한테 소설 읊으러 달려온거 아니니까요. 전 아침에 깨서 내내 그 꿈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이렇게 겨울씨 앞에서 말하고 있는 나도 현실의 내가 아닌 또 다른 꿈속의 내가 아닐까 헷갈릴 정도로..그 꿈은 생생했다구요. 무섭고 두려워서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바쁜 사람한테 떼쓴거 미안해요. 사람 한 명 살렸다 치세요. (옅은 웃음)
스쿠루지 여름씨의 크리스마스 캐럴이군요. (웃음)
뭐..정확하네요. (웃음)
그래서..저한테 돈을 좀 쓰러 오셨나요?
네..돈 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주시옵소서..(웃음)
미안하지만 이제 들어가봐야해요. 우리 회사엔 스쿠루지 여름씨보다 더한 분들이 많아서요. 그 분들도 시간이 곧 돈이죠. (웃음)
하..겨울씨를 그 무리에서 구해내고 싶어요. 가을동화 알죠? 얼마면 돼? 이 대사요..
여름씨. 빨리 일어나요. 그 돈 벌려면 여름씨의 소중한 인생 많이 낭비해야하는거 이젠 아시잖아요. (웃음) 사무실 들어가서 오늘 마무리 잘 하세요. 아...꿈 얘긴..너무 멋졌어요. 불러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털어놓지 않으면 미처버릴 것 같아 찾아온 상대가 저라서 영광이었어요. (웃음)
그야..저한테는 디폴트 값인걸요..아..저 주세요. 제가..아..커피 거의 못드셨구나...정말 짬내서 나오신 것 같네요. 감동입니다..
뛰어 돌아가는 겨울의 뒷모습을 여름은 눈으로 쫒는다. 저 사람..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남은 돈을 다 써도 아깝지 않을거라고..그렇게 빈털털이가 돼서 내일 세상을 등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웃는 여름. 안되지. 나는 죽지 않겠다고..우스꽝스러운 혼자만의 프로포즈를 한 게 이 까페 아니었나. 기꺼이 죽을 수는 있는데 죽어서는 안되는 목적격 대명사. 그녀의 이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