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연애

by 정자까야

여름은 겨울이 간 자리를 한동안 서성였다. 혹시나 하고 회사에는 이미 반차를 낸 상태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딱히 생각해둔 대안도 없었다. 회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집에 가자니 힘이 빠질 것 같았다. 커피나 한 잔 하면서 겨울씨 퇴근 무렵에 다시 전화해볼까 그 생각으로 기울어질 때 울리는 전화.


액정에 뜨는 이름 왕재수.


여름은 인상을 쓰고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네 김여름입니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겨울의 대학 후배 김봄. 나이도 어린 녀석이 대학 시절부터 겨울씨를 따라 다녔다고. 그걸 뭘 벼슬인냥 으스대던 밥 맛. 그게 김봄에 대한 여름의 첫인상이었다.


네 겨울 선배 만나셨다면서요? 좀전에 선배와 통화했습니다.


네 근데요? 제가 그쪽에 보고라도 해야 합니까? 겨울씨 볼 때마다? 여름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남자끼리 전화로 긴 말 할 필요 있습니까? 잠깐 보시죠. 드릴 말씀도 있고.


만나고 싶지 않고 대낮에 댁 볼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으나 무슨 말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딱히 일도 없었다.


여름은 인근 다른 카페로 약속을 했다. 겨울씨와의 추억이 있는 신성한 곳에 데려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봄은 먼저 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름은 사무적으로 물었다.


남자끼리 무슨 카펩니까. 아는 바(Bar)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옮기실래요?


대낮부터 무슨 술입니까.. 지금 시간이 오후 2시에요. 그리고 지금 여는 바가 있겠어요?


VIP에게는 가능한 시간이죠. 구경이라도 시켜드리려 했는데 관두시죠. 오늘 이미 커피 드셨을텐데 또 괜찮으실까 모르겠네요.


전 괜찮으니 주문하세요. 오래 안걸릴 듯 하니 얘기만 듣고 가겠습니다. 역시 밥 맛이라는 생각을 하며 여름은 대답했다.


봄의 나이를 정확히는 모른다. 겨울이 어학 연수 다녀와 복학했을 때 신입생이었다 했으니 세네살은 차이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 이제 갓 30대에 이른. 키도 적당하고 다부진 몸을 가졌다. 여름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겨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꽤나 미남이었다.


아시겠지만 전 예전부터 선배 좋아했었습니다. 선배가 대학 CC였을 때부터요. 선배는 후배로는 절 꽤나 인정해줘서 친구들과 선배집 가끔 놀러가곤 했죠. 선배 어머님과는 식사도 몇 번 했습니다.


또 밑밥깔고 시작하는군. 나는 겨울의 인생에서 후순위라 이건가..여름은 말없이 듣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론 일일이 대꾸 하고 있었다.


겨울 선배가 왜 전 남친과 헤어졌는지 잘 모르시죠? 선배 어머님이 보통이 아니시거든요.


김봄은 잠시 커피를 들었다 놨다. 여름은 물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본능적으로 중요한 얘기임을 직감했다.


선배가 위에 언니가 한 명 있어요. 공부를 꽤나 잘해서 의대에 갔죠. 거기에서 남친도 만났죠. 당연히 의대생이었고. 선배도 공부를 잘했지만 언니만큼은 아니었죠. 이건 절 디스하는 거기도 하지만 그래서 우리 학교 온거고. 근데 남친도 같은 학교. 엄마 입장에서는 의사 사위 2명을 얻고 싶었는지 언니한테 동생 소개좀 시켜달라 들들 볶은 모양이죠. 멀쩡하게 연애하는 남친은 시쳇말로 개무시하고.


김봄은 커피를 마시며 계속 이야기했다.


선배는 대학 생활을 좋아했고 동기들 선후배들과 격의없이 어울려서 부모님께도 소개하고 그랬어요.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래서 어머님도 알게 된거고. 선배 남친도 몇 차례 집에 가서 인사드렸겠죠. 어머님은 포커페이스 잘 못하시고 자신은 뒤끝없고 솔직한 걸 자랑으로 여기시는데 그 공격을 면전에서 받는 사람은 멘탈 유지하기 어려웠겠죠...

그렇군요. 여름은 경청하고 있었다. 겨울에 관한 일이었다. 봄이라는 장례의 연적에게 간접적으로 듣는 정보긴 했지만, 그래서 일정 부분 왜곡될 여지는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절대 건성건성 들을 수 있는 성격의 대화는 아니었다.


김봄은 여름의 표정을 슬쩍 살피곤 말을 이었다.


서로 좋아했으니 수년을 만났겠지만 겨울 선배가 더 상대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해요. 어머님을 정말 존경하고 따르던 선배였는데 남친 문제로 어머님과 사이가 많이 틀어진 걸 보면요. 당시 그 범생 선배가 날마다 술마시고 대학 동기집 전전한 걸 보면 진짜 그 남친을 좋아했던거죠. 문제는 남친 멘탈이 어머님을 이겨낼만큼 강하진 못했던 거고 갖은 모욕을 참아가며 선배를 챙길만큼 선배를 사랑하진 않았던 거? 저도 잘은 모릅니다. 선배 말, 대학 지인들 말 조금씩 짜깁기 한 거라..


네..여름은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님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겨울씨를 닮은 뿔 달린 악마?


여름씨. 제가 왜 이 말 드리는지 감이 오시죠? 여름씨를 위해, 선배를 위해 드리는 얘기에요. 여름씨가 어머님 성화를 견딜 수 있을거 같아요? 나름 엘리트 대학생도 최고 학부가 아니라고 못마땅해하신 분이에요. 여름씨는 상처 받을거고 그 와중에 겨울 선배는 부모님과 겨우 봉합했던 사이가 또 틀어질거라구요. 선배가 받을 상처를 여름씨가 아물게할 수 있어요? 못할 거에요. 못할 거라구요. 잘 생각하고 끝내세요. 제발.. 선배를 좋아하신다니 선배를 위해서 행동해 달라구요.


넌 그럼 뭐냐고. 겨울씨가 이즘 만나는..가을이라는 사람은 그럼 어머님께 인정받은 사람이냐고..그렇다면 봄 너도 언더독인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여름이 얘기하려는 찰라 봄은 일어났다.


먼저 가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여름은 머리가 아팠다. 봄이 남기고 간 얘기의 파편들을 주워모아 나름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여름의 머릿속은 끝었는 정체 상태였다.


그 와중에 김봄 저 녀석 예의는 일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화가 난 여름은 핸드폰을 열어 왕재수를 왕재수+싹아지로 고쳤다. 김봄이 남기고간 커피잔을 치우며 여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평범한 연애를 원하는 보통의 남자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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