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금요일은 주로 친구들과의 시간이었다. 경희, 미희와 만나거나 고등학교 친구, 혹은 회사 동료들과 보냈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도 주말에는 각자의 일정이 있는터라 시간 맞추기도 애매했고, 만나고 있는 이성인 가을은 금요일에도 야근을 하곤 했다.
가을은 로스쿨 졸업 후 국선변호사로 일했고 일년 전 쯤 로펌에 입사해 근무중이다. 겨울은 국선일 때의 가을을 모른다. 그 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까? 듣는 얘기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수임 사건은 많은데 상대적 박봉이라 심적,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겨울은 가을이 일반 로펌으로 전직한 즈음 소개로 만났다. 당시 가을은 새로운 직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금요일은 야근, 주말에도 하루는 사무실에 있곤 했다. 겨울과 만나는 것은 좋았지만 생존이 우선이었다. 다행히 겨울도 급해 보이지 않았다. 일년 정도만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것이고..결혼 같은 문제는 그 때가서 진지하게 생각하고픈 마음이었다.
가을씨랑 금요일 저녁은 오랜만이네요.
네..겨울씨.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안돼 자리잡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아뇨. 가을씨. 그렇게 정색하고 말씀하시면..핀잔 주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웃음) 네 알아요. 겨울씨가 그럴 리가요. 다만 제가 진짜 그렇게 느껴서요. 남들은 금요일이면 여친, 남친이랑 데이튼 한다고 들떠 있는데..겨울씨를 그리 혼자 두면 안됐던 거였어요.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잘 모실게요.
겨울은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아요. 가을씨. 전 진짜 괜찮았어요. 어쩌면 그게 겨울이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침묵한 이유는 그렇게 극구 괜찮다고 말하는것이 가을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비춰질까봐 미안했기 때문이다.
겨울은 가을을 만나면 말이 통하고 편했다. 서로의 일정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연애의 일반적인 코스, 이를테면 몇 번 만났으니 이 정도의 스킨십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최근 가을이 금요일에 시간 어떠냐고 물어왔을 때 겨울은 봄이의 말이 얼핏 생각났다. 여름이 이른바 애정의 전선에 뛰어든 이후 발생한 변화들. 가을이 현 직장으로 옮긴지도 어느덧 1년이 돼 간다. 업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이제 본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는 가을의 말. 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을까.
두 사람의 자리 옆에 앉아있던 가족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젊은 아빠와 엄마.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딸이 한 명. 가을은 문을 열고 나가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겨울은 가을의 시선을 보다 물었다.
왜요 가을씨? 아는 사람들인가요?
아뇨. 겨울씨...
말없이 바라보는 겨울의 시선을 느꼈는지 가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사무실에서 좀 일찍 나왔거든요. 여기 카페가 좀 작잖아요? 저녁겸 빵이랑 해서 드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이 시간에는 자리가 좀 없거든요. 부러 일찍 왔는데도 빈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좀전에 그 가족 중 아빠되는 사람이 혼자 테이블 2개를 잡아놓고 있더라구요. 가족 기다리는 줄 몰랐으니까 제가 물어봤어요. 1개 테이블 써도 되겠냐고.
근데요? 뭐라고 하던가요? 겨울은 호기심이 동했다.
슬쩍 보고는 건성으로 대답하더군요, 자리 있다고. 의자 네개가 다 필요한거냐 다시 물었더니 아예 대꾸를 안하는거에요. 사람 무시하는 것처럼.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요.
제가 기분이 많이 나빴죠. 자리 맡아놓는거야 누가 뭐라 합니까.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가 돼야죠. 시비조로 물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상대에게 예의없이 대하니..
기분 같아선 다른 곳 가거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고 싶었는데..기막히게도 바로 옆 자리만 비더군요. 할 수 없이 앉긴 했는데..
당연히 신경쓰였겠어요.
네..조금 있으려니 가족이 오더군요. 딸이 있던데 아이스크림을 더 달라고 칭얼거리는 거에요. 아빠라는 사람은 예뻐 죽겠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는 딸 입에 아이스크림을 떠먹여주는데..아이는 아빠에게 반말로 더 줘. 더 줘 그러더군요. 그러다 아빠가 안주니까 고성을 지르고..참..옆에서 봐주기 힘든 가족이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미안해요. 제가 좀 일찍 와서 같이 그 장면 봤음 다른 곳 가자 했을텐데..
아네요. 겨울씨가 늦은 것도 아니고..괜히 두 사람 고통스러울 것 있나요..
가을씨 보기에 아까 그 남자분이 남을 대하는 태도와 딸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게 좀 그러셨던거죠?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저리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나싶을 정도로. 주제 넘은 생각이지만 자식 교육도 잘못시킨 것 같고..그 나이쯤 되면 혼자 먹어야죠. 아빠한테 존댓말도 쓰게 하고..자기 성질 못이겨 고성 지르고..이렇게 키우면 그게 자식 사랑하는 건가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부모가 올곧으면 자식도 그리 클텐데..부모가 우선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으니 자식 교육도 그리 된 것 아닐까..그런 생각이 드네요.
네 겨울씨. 제가 엄한 아버지 밑에서 커서 그런가 예의 없는 사람들 보면 속에서 부아가 끓어요. 물론 밖으로 표현은 안하죠. 명색이 변호산데 법적으로 문제될 행동하면 안되니까요..일전에 기억나요? 우리 지하철 타고 갈 때 앞에 있던 커플?
아..기억나요. 그 때도 가을씨가 그 커플 내리고 나서 한마디 하셨죠. (웃음)
모르겠어요. 제가 꼰대인건지 사람들이 이상한건지. 그 때도 그렇죠. 젊은 커플이었는데 둘 다 앉아있는 앞에 거동 불편한 할머니가 오셨잖아요. 그랬더니 여자분이 남자한테 자리 양보하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남자는 들은 척도 안하고 여자분과 대화를 했죠. 여자분도 눈치를 보다가 그냥 계속 앉아있고.
겨울씨. 저도 알아요. 자리 양보가 의무는 아니죠. 더욱이 일반석이었고. 그 젊은 커플이 그날따라 어디 몸이 불편했을 수도 있죠..그래도..백번 양보해도..그 남자는 일어났어야죠. 여자친구는 앉게 하고..자기는 일어나고..좀 힘들어도..그게 맞는 거 아니에요?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요?
(웃음) 아뇨. 그 날 가을씨가 제게 했던 말 기억나서.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 있진 않았을거 같고 뒷담화라도 했을 것 같긴 한데..(웃음)
여자분은 하루라도 빨리 남자랑 헤어지는 게 좋을 거라고..(웃음)
아..제가 그랬었나요. (웃음) 근데..제가 이런저런 사건을 보잖아요. 실제로 데이트 폭력이 생각보다 많아요. 저도 이쪽 짬밥 몇 년 먹다보니 관상이란 걸 알게 모르게 신경쓰게 됐는데..그 때 그 남자..관상도 별로였어요.
그 날만 그랬었길 전 바래볼게요.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길..
글쎄요..겨울씨 긍정적인 건 제가 너무 좋아하지만..세상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그래도 가을씨는 정의로운 변호사잖아요. 국선변호인도 하시고. 예의에 어긋나는 일 못참고..
가을씨 같은 분이 있으니 아직은 세상 일 긍정적일 수 있어요. (웃음)
그게..
가을은 먹쩍은지 잠시 침묵했다.
겨울씨 기대 깨긴 싫지만 제가 정의롭다 느낀 적 한번도 없었어요. 그냥 젊은 꼰대같은 거에요. 저도 정의롭지 않지만 저보다 더 정의와 동떨어진 사람을 못참을 뿐이고 저도 예의를 지키지 못하지만 저보다 더 개차반인 사람을 용납 못할 뿐입니다. 국선변호사로 일한것도 제 커리어를 위해 그랬을 뿐, 크게 의미 둘 일 아니구요. 겨울씨 생각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었다면 돈 벌자고 거기 나와 로펌에서 진짜 정의를 갈아마시고 있지도 않을거에요.
진짜 정의요? 샌댈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그 정의요?
(웃음) 어느새 우리에겐 돈이 곧 정의입니다. 저도 그 하수인으로 살고 있고.
음..너무 자기를 폄하하시네요. 우리가 현실에 살아야 하니..돈도 필요하고 경력도 필요하고..그런거죠. 가을씨 충분히 잘 살고 있어요. 나름 정의롭게..나름 예의 갖추고.
겨울은 가을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을은 그런 겨울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