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겨울은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여름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밀고는 소리를 질렀다. 여름이 깜짝 놀라는 걸 보고 겨울은 한참을 입을 가리고 웃었다.
겨울씨. 사람이 놀랄 때마다 1분씩 수명이 짧아진다는 얘기가 있어요.
여름은 무안함에 허공을 보며 말했다.
여름씨. 그거 과학적 근거 1도 없는 얘기인 건 아시죠? 심지어 사람마다 줄어드는 시간도 달라요. 누군 1분, 누군 10초..
아니..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놀라면 심장에 좋지는 않다..그런 뜻이겠죠..
그렇겠죠. 그래서..여름씨. 기분 나빴다는 건가요?
겨울이 외려 토라진 듯했다. 여름은 양손을 휘져으며 그런게 아니라고 해명해야만 했다. 겨울은 웃었고 여름은 그제서야 따라 웃었다.
역시 배우 출신이시네요. 학교 연극이긴 해도..연기력이..(웃음)
겨울은 말없이 웃었다. 그런 겨울을 보고 있자니 문득..진짜 배우라해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 캐스팅? 뭐 그런거 받은적 없나요? 겨울씨 미모라면 충분히..
실은 두어번 받은 적 있어요. 진짜 길에서 명함 주더라구요. 연락은 물론 안했어요.
왜냐고 묻는 듯한 여름의 표정에 겨울은 다소 싱거운 답을 했다. 연예인 아무나 하나요..
호응이 없는 여름을 보고 겨울은 조금은 진지해졌다.
갇혀 지내는거잖아요. 대중의 시선에.
길 가다가 무단횡단할 때도 있고 주말이면 세수 안하고 마트 갈수도 있는거고. 일일이 그런거 신경쓰면서..전 못살것 같아요. 아..물론 연예인 할 재능이 안되느게 우선이구요.
제가 겨울씨 우연히 재회하고 자주 보기 시작한게 대여섯달 쯤 됐잖아요? 그러면서 느낀게 겨울씨는 참 털털한 사람 같다가도 또 어느 때는 정말 섬세한 사람 같고..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가족 문제 앞에서는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고..어느 쪽이 진짜 겨울씬건지..
다 제 모습인거죠. 그 총합이 겨울이란 사람인거고. 여름씨도 그래요. 본인만 모르고 있죠? 뭔가 신나게 얘기할 때 초롱초롱한 눈빛이며 엉뚱한 행동할 때 허당끼 있는거는 너무 젊고 순수해 보이다가도..뭔가 진지하게 말할 때 느껴지는 그윽한듯 서늘한 눈빛이나 다소 낮은 톤의 목소리는..
겨울은 여름을 힐끔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멋있어요.
참..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괜히 머리를 한 번 만지는 여름.
오늘 회사 송년회라고 했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시간 내신거에요? 여름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네 지금 좀 늦은게 거기 있다 온 거에요. 호텔 뷔페였는데 간단히 먹고 왔어요. 뷔페라서 다행히 오가는 사람 많아서 한두명 안보여도 괜찮을 거 같더라구요. (웃음)
저야 감사하긴 한데..사회 생활 그렇게 해도 괜찮으신거죠? (웃음)
짤리면 누가 책임져주겠죠. (웃음)
그 누군가는 참 황홀하겠네요. 그렇게 기쁜 책임이라니..(웃음)
여름씨. 내주에 출발이죠? 월요일에 바로 가시나요?
아..속초요? 네 맞아요. 벌써 고터 버스 예악해놨어요. 근데 몆 가지 문제가 있긴 하더라구요. (웃음)
네? 왜요? 회사에 휴가 못내게 됐나요?
아뇨. 그런건 아니고..리조트 티켓을 얻은 거다 보니..막연히 시내 근처일거라 생각했는데..티켓 주신 분이 노학동이라고 했거든요. 시내 옆도 노학동이길래 그런가보다 했죠. 근데..겨울씨도 나중에 찾아보세요. 서울과 달리 속초 자치구는 동서로 길게 뻗은 곳이 좀 있어요. 노학동도 그 중 하나라..시내 옆 노학동도 있지만 설악산 쪽 노학동도 있고..불행히도 그 리조트는 시내 반대편 노학동에 있더군요.
아..
버스가 잘 없어서..시간 맞춰 한참 기다리든가..아님 택시 타든가..그것도 아님 걷든가..해야 하는데 걸으면 시내까지 편도 한시간 반은 족히 걸려서..
아..그럼 어떻하죠? 그냥 차 가져가실래요?
아뇨. 애써 겨울씨가 생각해준건데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여름씨. 부담 팍팍 주시네요. (웃음)
오늘 뉴스 보니 주말에 동해안에 폭설이 예보돼 있다는데 버스 출발 안하는건 아닌지 전 그게 오히려 걱정인걸요..
여름씨 넘 무리 말아요.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진군해야 하는 비장미까지 느껴져서..이게 맞나 싶어요. (웃음)
겨울은 여름과 속초 여행 일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어느덧 헤어질 시간.
여름씨. 제가 오늘 조직 생활 부적응자 낙인을 무릅쓰고 나온 이유가 하나 있어요.
아..뭐죠?
여름씨가 겨울 바다를 상상하며 쓴 시..
아..그거요..
여름은 겨울의 미션 중 겨울 바다를 본 감상을 시로 표현해달라는 부탁을 종일 생각하고 있었다. 막상 바다를 봐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전 새벽에 잠이 깬 후 다시 잠을 청해도 소용 없길래 컴컴한 새벽에 길을 나선 적이 있다. 저 멀리 동이 트는 느낌에 도로는 흡사 바다를 연상케 했다. 떠오르는 시상에 흥분하여 길 한복판에서 핸드폰으로 정신없이 적어 내려갔다. 손이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즐거움이라니.
여름은 겨울에게 바다를 볼 것도 없이 이미 시를 지었다고 말해버렸다. 입을 꾹 닫고 있어야했지만 겨울과 통화하다보면 그게 잘 안됐다.
그 시..보고 싶어요. 오늘 저 주시면 안될까요? 내주 월요일까지 기다리는 건 저를 조바심들게 하는 건 물론이고 여름씨까지 미치게 할 거에요. 저 보여주려고 지은건데 주말동안 그걸 어떻게 참으실 수 있겠어요? (웃음)
제 머릿속에 들어와 계신 느낌이네요..가요. 제가 카톡으로 바로 보내드릴게요.
겨울은 지하철 대합실에서 시를 받았다. 다 읽고 겨울은 핸드폰을 가슴에 꼭 안았다. 마치 러브 레터를 읽고 편지지를 가슴에 품듯이..그렇게 눈을 감고 시와 여름을 느꼈다.
<바다가 전한 말>
터미널에 내렸다
네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네가 내 옆에 있다고 오감이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의 너라니
나는 천천히 걸으며 널 느꼈다
문을 열자 반기는 강아지마냥
저 멀리 굽이치는 너울
내 품에 안기며
뺨을 핥아대는 파도의 잔해
그래 바다야 널 보러 왔어
네가 보고파 널 보러
하지만 너는 몇 번의 애무 후에 멀어져갔다
모래 종이에 파도로 글을 써놓고는
네 흔적을 눈을 크게 뜨고 읽었어
여름아 그녀를 보러가..
너는 알았던거야
널 껴안고 널 쓰다듬는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 다른 이가 있다는걸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걸
미안해 바다야
널 안으며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고마워 바다야
내가 있어야할 곳을 알려줘서
나는 바다 너를 등지고
걷기 시작한다
너는 바람으로 내 등을 떠민다
달렸다
전속력으로
그녀 겨울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