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반했으니까.

by 정자까야

겨울아. 아까 봄이한테서 전화 왔었는데..


봄이요? 봄이 엄마한테 전화했다구요?


그래. 너한테 연락했었는데 안받는다고 그러던데?


아..그래요? 저 아까 잠깐 나갔다 올 때 핸드폰 두고 갔었는데 그 때 했나 보네요. 왜 전화했데요?


자기 이 근처에 볼 일 있는데 저녁에 집에 있음 저녁 먹으러 와도 되겠냐는데?


겨울은 피식 웃었다. 봄은 막무가내다. 은근히 신호를 줘도 도통 받지를 않는다. 너는 친동생 같고 좋은 후배라고 몇 번을 얘기했던가.


오래된 인연의 함정은 웬만해선 새로운 관계 설정이 힘들다는 것이다. 겨울도 남자로서의 봄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봄이도 겨울의 마음을 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물러섰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라. 대학 시절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다. 지금의 봄과는 사뭇 달랐다. 좋아하는 선배에게 말 걸기도 어려운 쑥맥같은 순수함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기회가 올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겨울의 주변에는 늘 애정을 갈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다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봄은 변했다.


겨울에게 고백했고 에둘러 거절당했다. 예상했던 반응. 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겨울을 대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친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어머니도 언젠가는 봄이의 의도를 알아채실 것이다. 그 때 저울질 하실테고 자신이 객관적으로 뒤질 것이 없다고 믿기에 이 도박은 걸어볼만하다고 판단했다. 겨울 선배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을 얻으면 천천히 해결해도 될 문제였다. 선배는 주위의 사람들, 특히 어머니를 등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봄이 언제 온대요?


아까 통화했을 때 한시간 정도 걸릴 거라 했으니 얼추 올 때 된 거 같은데?


십여분 지났을까. 봄이는 양손에 찬거리를 잔뜩 지고 왔다.


선배. 어머님 저 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폼이 예비 사위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봄이는 집이 서울인데도 대학 근처에 집을 얻어 자취를 했었다. 왜인지 물어본 적은 없다. 대학 생활에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겨울의 학부 후배면서 동아리 후배기도 했다. 당초 영어 연극 동아리였는데 호객 차원에서 우리말로 연극을 몇 편 올리기도 했었다. 봄은 당시만 해도 숫기가 없어 주로 연출역을 맡았다. 인물이 훤해 무대에 어울린다고 선배들이 권해도 한사코 거절했었다.


봄아. 너 또 요리하려고?


겨울의 엄마는 봄이를 막내 아들 대하듯 살갑게 지내왔다. 학벌 좋은 재력가의 자제. 게다가 인물까지 있는 이를 싫어할 이유도 없지만 겨울의 엄마 입장에선 더더욱 반기고픈 인물이었으리라.


어머니. 제가 대학생 때 자취 오래했잖아요. 그 때 쌓은 실력 안풀면 억울해서 못살아요. 저도 좋아하는 사람 위해 그 때나 지금이나 요리 배운건데 써먹을 날이 있겠죠..


봄이는 익숙한 칼놀림으로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 건 없니?


겨울은 봄이가 온 후 처음으로 말을 건넨다. 눈 인사 후 줄곧 봄이를 보고 있었다. 겨울은 봄이를 말릴 수 없었다. 저러다 말길 바랐다. 봄이가 엄마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마뜩잖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봄이와 엄마의 관계는 두 사람의 일이다. 겨울이 왜 만나냐고 따지는 것은 모양새가 우습다.


없어요. 선배는 맛있게 먹어주면 됩니다.


셋은 식탁에 앉았다.


봄이 너까지 셋이 있으니 왠지 꽉 차보이고 좋구나. 이 집은 둘이 살기엔 좀 넓긴 해.


엄마는 봄이의 직장, 부모님 안부 등 이것저것을 물었다. 처음 보는 이는 당황할 법한 호구조사식 대화. 봄이는 이미 익숙해졌고 외려 어머니가 좋아할만한 얘기를 미리 꺼낼 정도였다.


그래? 아버님이 이번에 임원 승진하셨다고? 아이고..축하드릴 일이네. 겨울 선배 부모님이 축하 전해달라 그러셨다고 꼭 말씀드리고. 알았지?


그나저나..선배는 결혼..계획 있어요? 만나는 분은 있잖아요. 꽤 시간 된 것 같아서..


봄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툭 뱉는다. 엄마는 겨울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애는 무슨 생각인지..진지하게 만나는 거면 한 번 데려오든가..그게 아니면 빨리 정리하고 딴 사람을 만나든가 해야할텐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그 상대는 나이도 있다면서 계속 기다린다니?


두 사람이 신경쓸 일 아니잖아요. 겨울은 쏘아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을씨 좋은 사람이에요. 외부에서 자꾸 흔들지 말아요. 우리 둘 일은 우리가 결정할거에요.

그리고..가을씨가 됐건 누가 됐건 그 사람이 엄마 맘에 안들어도 존중해줘요. 제가 같이 살 사람이잖아요. 엄마랑 살 사람 아니니까..


계속되는 침묵.


먼저 일어날게요. 잘 먹었습니다.


겨울은 대문을 열고 집 앞 마당으로 나왔다. 길게 숨을 쉬어본다. 12월. 초저녁인데도 벌써 어스름이 깔렸다.


조금 있다 봄이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선배 미안해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봄아. 네 의도는 중요치 않아. 엄마와 내가 이 문제로 얼마나 서로에게 상처줬는지 너도 알잖아? 나랑 한마디 상의 없이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결국 이 사달을 내야겠니?


평소의 겨울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겨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겨울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따지고 보면 봄이 네 잘못은 아냐.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쌓아두고만 있었던 내 잘못이야. 봄이 네가 아니었다해도, 수시로 터질 일이었어. 며칠 전에도 그랬고 몇 달 전에도 그랬어. 달라진 건 없어. 점점 내가 지쳐가고 있을 뿐.


봄은 계단에 걸터앉은 채 말했다.


선배. 저 1학년 때 우리 동아리에서 창작극 했던거 기억나요? '햇살 속으로'..였나..그 때 극 마치고 기념 촬영한다고 했을 때 선배가 경희 선배 찍은 핸드폰 사진 들고...경희도 오고 싶었는데..같이 사진이라도 찍게요..한 팀이잖아요..그랬던거 기억나요? 아마 기억 못할거에요. 선배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을테니.


전 그 때, 웃기는 말이지만 충격 받았거든요. 남을 배려한다는게 어떤 건지. 타인에 대한 마음씀이란 게 뭔지 그 날 처음 알았던 것마냥...그냥 간단히 말할게요. 그 날 선배에게 반했어요..완전히..


원하는 대학이 아니라서 입학만 하고 바로 재수 공부하려고 했었어요..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를 보고 ...재수는..남의 일이 됐죠. (웃음)

팔자에도 없는 연극은 왜 시작했겠습니까..누구 보고 싶어 들어온 거죠. 역을 맡으면 대사 외우느라 제 파트너와 연습하느라..선배 볼 시간이 줄어 한사코 거절했었죠. 연출 한답시고 종일 선배 따라다닐 수 있어 좋았었어요.


어쩌면 그 전까지는 선배의 외모에서 풍기는 아우라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날 친구를 생각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내면의 아름다움이 뭔지를 알아버렸어요..어쩌겠습니까. 저에겐 운명같은 것이었는데..


봄은 어스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저를 봐주실거라 생각했어요. 제 고백이 너무 늦고 서툴렀던거 알아요. 그래도 중요한 건 진실된 마음이니..선배가 알아줄 계기만 있다면..곁에 있다보면 그럴 기회가 있을거라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을이란 사람이 선배 곁에 있을 때는 조바심이 일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선배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봤으려나요..두 사람 서로 정적이고 배려심도 깊어서인지 상대가 일이 있거나 하면 굳이 애써서 보거나 하지 않더군요. 띄엄띄엄 정을 이어가는 느낌이라 별로 걱정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여름이란 사람이 선배의 일상에 들어온 이후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어요. 선배의 일상도, 마음도 뒤죽박죽 엉키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저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메기 효과라고 해야 하나요. 그 사람이 들어온 후 갑자기 가을씨도 속도를 내는 느낌이었어요. 위기 의식을 느낀 거겠죠. 선배에게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보자고 하고..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봄이는 하늘을 보던 시선을 거두어 겨울을 쳐다보았다.


오늘 일은 확실히 무리수였어요. 이런 식의 조바심은 아닌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봄아..


초반보단 많이 지쳤어요. 인정할게요. 하지만 이대로 포기는 못합니다. 하필이면 너무 멋진 여자를 신입생 때 만나서..지금껏 다른 누구한테 진정어린 눈길 한 번 못줘본 제 인생이 불쌍해서 이대로는 못 끝내요. (웃음)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스토커로 신고하실 거 아니면..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오랜 속담을 믿고 싶습니다. 사람 마음..영원한 건 없는거죠. 선배의 마음..선배 자신도 모르는 거니까..


봄은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떠났다. 겨울은 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여름에게도 시간을 줬다. 봄이에게도..오랫동안 날 지켜준 그 아이에게도 여름에게 준 그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두계절 뿐일테니..봄이 오면..아니 아무리 늦어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그때는 결정을 해야 한다. 가을도 더는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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