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휴가를 하루 냈다, 보고픈 언니를 만나러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언니는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룸메로 연을 맺었다. 나이 차이가 띠동갑 가까웠지만 이국에서 맺은 우정은 친자매만큼이나 두터웠다. 솔직히 겨울은 힘든 일이 있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거나 소소한 일상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고 싶을 때 친언니를 찾은 적이 없었다. 집에서는 캐나다 언니로 통하는 수정 언니는 겨울에게 친언니이자 때로는 엄마이기도 했다.
언니!
겨울은 출입구에서 언니를 보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수정은 무안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걸어오더니
겨울아. 여기 국내선이야. 누가 보면 해외에서 온 줄 알겠다. (웃음)
안되요. 언니. 국제선이면. 나 언니 보고싶어 어떻게 살아. 그나저나 제주 근무는 언제 끝나요?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수정은 제주로 발령받아 주말 부부 생활중이다.
이제 1년 됐으니..내년까지만 하면 후년엔 올라갈 것 같아.
애들은 잘 지내죠? 애들 키우느라 형부가 고생하겠네요. (웃음)
고생 좀 해봐야 알지. 애들 키우는 엄마 맘을. (웃음)
둘은 겨울이 미리 봐둔 공항 근처 브런치 카페로 이동했다. 평일 오전. 이런 여유는 오랜만이다.
그나저나 겨울이 넌 결혼 안해? 가을씬가 그 분 나이도 있다며..
에이. 언니. 이즘은 다들 늦게 해서..가을씨도 저보다 두살밖에 안많아요. 누가 들음 마흔쯤 되는지 알겠어요.
하긴. 이즘은 남자들이 그 즈음 결혼 많이 한다곤 하더라. 넌 예전에 비혼 비슷한 주의 아니었니? 왜 생각이 바꼈어? 살아보니 그게 아니야? (웃음)
제가 그랬었나요? (웃음) 언니랑 처음 만났을 땐 어렸으니까. 그 뒤로 몇 번 사람 만났을 때도..결혼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 나한테도 많이 얘기했었잖아. 연애 얘기. 너 소개팅 한 것만 세도 책 한 권은 내겠다. (웃음)
언니. 저도 벌써 서른 중반이에요. 일년에 한번만 소개팅해도 열 댓번은 한거니까..그렇게 많이 만난 건 아니라구요. 저 이상한 여자 만들지 마요. (웃음)
농담이지. 그래봐야 진지하게 사귄 건 두어번 뿐이잖아. 대학 신입생 때였던가..너랑 나랑 룸메일 때 들려줬던. 그리고 회사 입사한지 얼마 안됐을 때. 맞지?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고..
맞아요. 그래서 더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질 않은거에요. 처음은 그냥 어렸고 두번째도 나이는 많지 않았으니. 지금은..저는 사실 지금도 급한 생각은 없는데 상대도 생각해야 하다보니..결혼에 대해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더라구요.
그럴거야. 상대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순 없겠지. 그럼 나 제주 근무 마치고 올라오기 전에 국수 먹는건가? (웃음)
그건..모르겠어요.
왜? 뭐가 또 있어?
겨울은 가을과의 관계, 몇 개월 전 일어난, 주로 여름과 관련된 이야기, 엄마와의 생활..이런 주변의 일들에 대해 수정에게 비교적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렇구나. 가을씨도 참 좋은 사람이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는걸 지켜보는게 쉬운 일이니.
그러니까요. 전 진짜 나쁜 앤가봐요.
모르겠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늘 메인이 아닌 주변인들에게 관심이 있잖아? 드라마 봐도..여주와 남주는 서로 운명 같은 사랑하니까..시청자들이야 어떻게든 둘이 이어지길 바라겠지만..아 그래. 우리 캐나다에서 같이 봤던 영화 '폴링인 러브' 기억나지? 그 영화 보고 너랑 나랑 숙소에서 밤 늦게까지 옥신각신했잖아. 넌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상황이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마지막에 둘이 잘 돼서 다행이라고 했고..난 여주인공 남편, 남주인공 부인은 뭐가 되냐며 열을 냈었지. 기억나? (웃음)
잊을 수가 있나요. 그 때 알았죠. 언니는 상대적 약자 편임을. (웃음)
몰라. 내가 어떤 성향인진. 근데 그건 지금도 그래서 드라마를 보든 소설을 읽든 난 항상 주목받지 못하는 조연들의 마음이 더 이해가 되고 그들이 잘됐음 싶더라고.
맞아요. 여름씨 얘기 들려주면 친구들은 여름씨에 대해 집중하는데 언니는 가을씨부터 먼저 챙기는 거 보면..
아니 그렇다고 여름이란 분을 내가 싫어하는 게 아냐. 오해하지 마라. (웃음)
아 그럼요. 언니가 봐도 잼있는 사람이죠?
예전에 겨울연가 일본에서 한창 유행할 때 일본 시청자들이 배용준 역 남자 주인공이 너무 불쌍하고 안돼 보여서 많이 울었다는 기사가 났었어. 왠지 여름씨란 사람. 그 느낌이 나. 겨울이 네 어머님 성향이나 가을씨라는 사람의 괜찮은 인품. 결국은 그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는 네 성향 등을 감안하면..지금의 네 흔들림은 '정해진 망설임'일 가능성이 크고..아마 여름씨는 무대를 내려와야 하는 남자주인공이 아닐까 싶네. 이 극의 남자주인공으로 시청자들의 연민과 애정이야 한 몸에 받겠지만..그 사람의 인생만을 두고 본다면 너무 슬픈 일이지.
언니..나 어쩌면 좋아요..
네 인생이야. 겨울아. 네가 행복해야 해. 미안하지만 가을씨도, 여름씨도, 어머니도 네 인생에선 다 조연들이야. 네 결정으로 그들이 슬픈 운명을 맞이해야 한대도 그건 어쩔 수 없는거야. 마음 가는대로 해. 결혼을 하든 미혼으로 남든. 누굴 선택하든 누글 미안하게 하든. 후회가 없어야 그 다음 인생을 살 수 있어.
언니..
지켜 봐. 네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가을이 조바심내지 않고 끝까지 우직하게 버티는지. 여름이 얼마나 너에 대해 진심이고 네 마음을 흔들 수 있는지. 엄마는..하..사실 엄마가 제일 어렵다..엄마가 겨울이 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살며서 처음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봐. 그건 엄마로서는 큰 용기겠지만.
얘좀 봐. 너 지금 우느거야?
겨울은 한동안 말없이 울었다. 수정은 그런 겨울을 또 말없이 안아줬다.
둘은 저녁을 먹고 하루 두번째 커피를 마시고야 슬슬 자리를 일어날 채비를 했다.
언니. 언니는 결혼 생활 만족해요? 형부가 결혼 전이랑 똑같나요? 변하지 않는 애정..그런게 있나요?
겨울아. 사람이 어떻게 한결같이 사랑해. 사랑이란게 호르몬의 작용이고 기껏해야 2년 간다는 말도 있잖아. 남편이랑 갈등도 많았어. 이 인간이 미혼 시절 나 따라다녔던 사람 맞나 싶은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언젠가 남편이 그러더라.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결혼 안했으면 각자 능력 있으니 먹고싶은거 먹고 여행 다니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나고..이렇게 집 사려고 애들 먹이려고..본인들 먹는거 좋아하는거 다 억누르고 실 필요 없었을거라고..
겨울은 잠자코 들었다. 없는 말할 언니는 아니었다.
남편 말 들으니 맞는 말이겠다 싶더라. 내가 결혼 안했다면 집 사려고 이렇게 아둥바둥했을까..싶고. 아마 다르게 살았겠지. 그 때도 고민은 있겠지만 지금처럼 말 안듣는 자식 새끼들 때문에 힘들거나 남편이랑 돈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겠지.
언니. 다시 산다면 그럼..
결혼 안했을것 같아. (웃음)
정말로요? 그럼 형부는 둘째치고 애들은요?
다시 사는 일은 없으니까..내가 사는 곳은 현실이잖아. 그래서..어차피 없을 일이니 애들 고민 안하고 나만 생각한거야. 상상속의 답변이니..그냥 솔직하게..(웃음)
아이들 너무 사랑해서..현실에 사는 게 다행이고 버틸만 해. 남편? 사랑하지 진심으로. 하지만 죽을 때까지 표현하는 일은 없을거야. (웃음)
그렇군요. 결혼은 나만 생각하면 할 수 없는..영화 제목마냥 미친 짓일지도..
그렇지. 근데도 하는 이유는? 그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그 질문에 대한 탐험이라고 해야 하나..
언니 경험으로는 탐험의 언제부터 욕 나오기 시작해요? (웃음)
거의 처음부터..거의 끝까지.
겨울은 모처럼 크게 웃었다. 천상 여자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던 터라 이 호탕한 웃음은 겨울 스스로에게도 낯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