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들 불러다 먹지 왜 우릴 불러? 영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투덜댔다.
다희는 영수를 빤히 보더니
오빠 이즘 누구 만나? 언제는 모임 좀 잡아달라고, 자기 심심하다고 그렇게 조르더니만..금사빠 기질 발휘해서 그새 또 누구 만났어?
다희가 쏘아붙이자 영수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미리 미리 얘기 좀 하라 이거지. 아무리 내가 한량이라지만 나도 스케줄이란 게 있어.
영수의 말에 다희는 맥이 풀렸는지 냅킨을 집어던지며
그건 오빠 말이 맞는데..내가 오죽하면 긴급소집했겠어. 주가가 이렇게 떨어지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삼전이 11% 하락이라니..말이 되?
옆에서 맥주만 홀짝홀짝 마시던 여름이 그제서야 한마디 했다.
다희야. 전쟁이야. 사람이 죽고 사는 거라고. 돈은 둘째 문제잖아.
다들 그건 그렇다는 표정으로 숙연해지자 여름은 분위기를 바꾸려 허당끼있게 얘기했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들어갔길래 그래? 나처럼 돈 없는 사람은 타격도 없잖아. 잃을 돈도 있고, 부럽다 야.
그 말에 다희는 여름을 흘겨 보며 말했다.
으이구. 누가 오빠 데리고 살지 몰라도 고생 길이 보인다. 이즘이 어떤 시대인데..투자도 좀 하고 살아. 그나저나 모아둔 돈은 있어? 겨울인지 한파인지 그 사람 오빠 빈털털인거 알기는 해?
여름은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거지.
에휴. 말을 말자. 다희는 맥주를 건배도 않고 혼자 마셨다.
근데 누구 또 와? 왜 자꾸 핸드폰을 봐? 영수가 물었다.
아..내 친구 선영이 불렀어. 다들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내 단짝 친구.
선영이? 영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여름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영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영은 여름을 한 눈에 알아보고 반갑게 악수를 했지만 영수는 초면이라는 표정으로 쭈삣쭈삣 인사를 하곤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몰라? 3년을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다희의 말에
이봐. 넌 전교생 다 기억하니? 엮인 일 없었으면 기억 못한다고..졸업한지 몆 년이냐..영수가 항변했다.
넷은 고등학교 얘기를 안주삼아 맥주를 몇 잔 마셨다.
그나저나 여름 선배는 글 안써요? 고등학생 때도 예사롭지 않았는데..의외에요. 전 선배 국문과 갈 줄 알았거든요.
선영이가 말하자 다희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우리 폐허씨께선 왜 자기 전문 안살리고 허송세월 하고 계실까.
여름의 펜팔 상대가 선영이었음을 알아차린 영수는 박장대소를 했다. 여름과 다희가 펜팔을 계기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직작에 들어 알았지만.
허송세월이라니.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 있다는 느낌인데..게다가..
잠시 뜸을 들이다 여름은 말을 이어갔다.
제주라도 발령받음 모를까. 서울은 글을 쓰기엔 너무 번잡한 도시야..
그래? 오빠 그럼 제주 지원하면 되잖아? 다희가 물었다.
말이 되냐? 겨울씨는 어쩌라구..영수는 여름 대신 대답하곤 뭔가 생각난듯이
아..그렇게 물리적 거리를 만들어놓고 다희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치밀하네..치밀해.
다희는 영수를 쏘아보곤 여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여름씨. 제가 대신 못할 것도 없잖아요? 겨울씨랑 키스해 봤어요? 키스는 커녕 손도 못잡아봤겠죠. 제 입으로 이런 얘기 하는 건 뭐하지만 우린 뽀뽀도 한 사이잖아요..
선영은 깜짝 놀라 입을 손으로 가렸고 영수는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거냐며 흥분했다.
여름 너 이자식. 얌전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다희랑 그랬다고? 겨울씨가 알면 넌 끝이다 끝.
여름은 영수의 막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영수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부인 안하는거 보니 설마 진짜야? 영수는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선영도 다희를 보며 귓속말로 진짜냐고 연신 물었다.
다희가..여름은 다희를 보곤 웃으며 설명했다.
다희가 볼에 뽀뽀를 했어. 약간 기습적이었지. 노을이 다희를 비추는데 좀 멋지긴 하더라. 그 분위기에 나도 살짝 취했던 것 같아. 다희가 다가오는데 발이 안떨어지더라구.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그 때 든 생각은 둘이야. 다희가 멋진 여자라는 것. 그리고 빨리 제 짝을 만났으면 하는.
약주고 병주네. 순서를 좀 바꿔 말하든가..다희는 맥주를 마저 마시더니.
아..오늘 주가도 엉망이고 여름씨도 날 밀어내는구나. 술을 부르는 날이로고..
여름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봄이야..날은 여전히 춥지만 이 추위에는 살기가 없어. 봄이 다가오는 게 느껴져.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갑자기 시를 옲냐..영수가 끼어들자 다희가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줬다. 선영은 여름이 여전히 문학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들 알겠지만 봄이 얼마나 허무해. 벚꽃 몇 번 날리면 끝물이잖아. 곧 기온이 오르고 여름에 접어들겠지. 그게..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을거야.
무슨 말이야? 여름에 무슨 일 있어? 영수가 물었다.
아무 일 없길 바라. 우리 인사발령 시즌이거든...지난 발령 때 동기 한 명은 부산으로, 한 명은 광주로 내려갔어. 나도 입사 후 쭉 수도권에 있어서..가능성이 있어.
어느 정도의 확률로요? 선영이 물었다.
상당한 확률로. 여름은 선영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미묘했다. 체념같기도 의지같기도 했다.
겨울씨가 만나고 있는 가을이란 남자도 겨울씨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릴 모양인가봐. 하긴. 오래 기다리긴 했지. 나도 얼추 1년이 다 돼가니 그 쪽은... 어차피 여름을 넘기진 않을 것 같아. 서서히..결론을 향해 가는 느낌이야.
어쩔 셈이야? 영수가 물었다.
어쩌긴. 난 남아 있는 하루하루가 소중해. 다희에게 미안하지만..겨울이란 사람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싶어. 지금은 공을 던지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마운드에서 강제로 강판될 판이야..그게..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만.
다희에게 선배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차라리 그 분한테 대쉬하는 게 어때요? 그렇게 조심스럽게 기다려서..뭘 얻겠어요.
좋은 지적이야. 여름은 신음하듯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뭔가 부족한 느낌이야. 상대는 어머니를 잃으면서까지 나를 택하지는 않을 것 같아. 누구나 그렇지만..어머니는 곧 삶이잖아. 무의식의 영역이라..
그렇다고 쭉 이렇게 가요? 선영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나한테 어떤 계기가 필요할 것 같아. 다희야..자꾸 너한테 미안한데..여름은 다희를 보며 웃었다.
그 날 네가 나에게 다가왔던..그런 분위기..어떤 장면..결정적인 계기..누가 등을 떠민 것 같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거부할 수 없는..그런 장면이 필요해.
그걸 우주의 기운이라고 하는거야. 다희가 입을 쭉 내밀고 토라진 티를 내며 말했다.
그래. 우주의 기운. 우주가 날 좀 도와줘야 할 것 같다..
웃긴 얘기지만 다희가 사랑을 가르쳐 준 셈이네..그런 식으로 하라고 말야..영수가 말했다.
가르쳐 주긴 누가 가르쳐 줘요. 그건 내 꺼라구요. 여름 선배. 내가 말했지? 난 기다린다고. 우주의 기운이 누구 편인지 보자구요. 만약 우주가 여전히 내 편이라면 더 이상 청승 부리지 말고..
다희도 지지 않고 말했다.
김여름. 하여간 복 받은 놈이야..영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슬슬 취기가 오르는 중에 선영이 물었다.
선배. 내가 다희 절친이어서 그런게 아니라..선배 성격에는 다희가 맞는 거 같지 않아요? 오늘 두 사람 보니 너무 죽이 잘 맞고 서로에 대한 애정도 있고..난 좋아 보이는데..그리고 선배가 낭만적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감정의 기복이 커서..그 분..들어보니 굉장히 차분하고 고상한 느낌인데 잘 어울릴까..그런 생각도 얼핏 스쳐요. 미안해요. 그냥 저도 선배가 잘 됐음 해서..제 첫 펜팔 상대셨잖아요. (웃음)
여름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다희는 선영의 말을 받았다.
그래. 선영아. 네가 정확하네. 맞아. 선배같이 롤러코스터 타는 남자는 나같이 통 큰 여자나 감당 가능하다고. 봐봐. 난 오늘 11% 손실도 웃어넘기는 사람이야..
다희는 호기롭게 건배 제의를 했다. 모두 잔을 들었다. 여름은 투명한 맥주 뒤에 어른거리는 무엇인가를 봤다. 자세히 보니 아리따운 얼굴이었다. 차분하고 고상한 느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