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알아볼만큼의 거리에서 두 사람은 뛰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었다. 겨울의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숨이 살짝 가쁜지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정장 차림에 작은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여름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겨울의 전화가 울렸다. 겨울은 발신인을 확인하곤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아..네.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급해서..네 네..알겠습니다. 있다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겨울은 소리 내 웃었다. 상황을 짐작한 여름도 따라 웃었다. 아무도 없는 다리 위에서 둘은 모처럼 소리 내 실컷 웃었다.
겨울이 웃는 사이 가방에서 작은 물건이 하나 떨어져 여름이 주워 겨울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건네받은 소품을 보곤 겨울은 또 웃었다.
아..마이크에요. 휴대용 소형 마이크. 발제할 때 쓰라고 주최측에서 나눠줬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반납하는 것도 잊었네요. 고장나면 안되는데..
겨울은 그러더니 마이크를 대고 아..아..소리를 내며 테스트를 했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여름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핸드폰을 찾더니 유투브 노래방을 켜고 겨울이 유일하게 외운다던, 며칠 전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의 반주를 틀었다.
갑작스런 반주에 겨울은 흠칫 놀랐지만 여름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곤 나지막한 음성으로
부탁해요. 겨울씨.
그 말에 겨울은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다리 위에 행인은 없었고 옆 차도로 차들은 천천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왼쪽으로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푸른 물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마치 겨울에게
우린 준비됐어. 네 노래를 들려주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겨울은 마이크 테스트 모드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전주에 집중했다.
곧 민락교 위의 음악이 시작됐다. 겨울은 처음 몇 음절을 부르는 동안 여름과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움에 박자를 몇 번 놓쳤다. 하지만 이내 진지해져 한 음절 한 음절 감정을 실었다. 이별 후 사랑을 깨달은 여인의 절절함이 겨울의 음성으로 되살아났다.
평소의 사근사근함에 풍부한 감정이 배가되어 겨울의 음색은 사뭇 황홀했다. 고음이 터지는 클라이맥스에서 겨울은 눈을 감았고 여름은 소름이 돋아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몸을 감쌌다.
훌륭한 공연이었다. 반짝이는 강, 다리 위, 한 사람을 위한 노래..모든 것이 완벽했다. 노래를 마친 겨울은 스스로도 감정에 북받쳤는지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노래를 들어준 한 명의 관객에게 예의를 갖췄다. 서행하던 차 두어 대가 경적을 울렸다. 경적의 강도가 항의라기보단 박수 갈채에 가까웠다.
여름과 겨울은 경적 소리에 고개를 돌리곤 함께 웃었다.
관객이 저 말고도 또 있었네요.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이런 황홀한 무대는. 노래 부르는 내내 소름 돋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여름씨는..제가 모르는 제 안의 것들을 끄집어내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런 능력이 원래 제 것이었던 것마냥.
제가 감사하죠. 이렇게 멋진 노래를..저만을 위해 불러주셨는데..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에요. 오늘의 감동을. 정말 고마워요. 겨울씨.
겨울은 싱긋 웃더니 갑자기 마이크를 여름에게 넘겼다.
여름의 반응이 없자 겨울은 덧붙여 말했다.
뭐하세요. 노래방 와서 한 곡도 안하시려구요?
여름은 박장대소하고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제가 가사를 외우는 노래는 2개 있어요. 오래된 노래와 더 오래된 노래.(웃음) 뭘 원해요?
후자요. 더 오래된 노래. 겨울다운 선택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제겐 영원히 소녀 같을 분께 이 노래를 바칩니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반주를 듣곤 겨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여름에게 알렸다.
여름은 나릇나릇한 음성으로, 겨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노래를 이어갔다. 중간에 반주가 나오자 여름은 특유의 그로브한 리듬을 섞어 춤을 추었다.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고 손가락을 튕기며 리듬을 타고는 그 자리에서 한바퀴 턴을 하는 여름을 보며 겨울은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 순간만큼은 여름은 겨울의 아이돌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여름도 90도로 겨울에게 인사했다. 겨울은 진심에서 우러난 박수 갈채로 화답했다.
마이크를 돌려주며 여름이 말했다.
겨울씨. 이 노래 언젠가 겨울씨에게 들려주려고 부러 외운 거에요. 가사가 제 마음과 닮아서요. 항상..당신 곁에 머물거에요.
겨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짐작했다는 듯이.
여름은 윤슬과 겨울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소녀에게 묻습니다. 광안리로 가실래요? 아니면 해운대?
겨울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광안리요. 해운대는 보는 눈들이 많아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요. 눈치보지 않고 여름씨와 즐기고 싶어요.
여름은 몸을 틀어 광안리로 걷기 시작했다. 겨울은 마이크를 가방에 넣으며 생각했다. 난 오늘 이 마이크를 길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주최측이 찾더라도 돌려주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