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점심을 먹고 각자의 차에 올랐다. 경희와 병화는 배우자를 생각해 바로 출발했고 희상이도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곤 부랴부랴 떠났다. 택시를 타고 온 여름은 영수의 차에, 겨울은 미희의 차에 탔다.
서울로 진입할 무렵 영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여름아. 이 차 네가 운전하고 난 저 쪽 차에, 겨울씨가 이 차에 탔으면 좋았겠다.
여름은 웃으며 그런 좋은 생각을 왜 지금에나 말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게 말이다. 영수는 썬글라스가 들썩일 정도로 씩 웃었다. 영수가 잘 돼서 다행이라고 여름은 생각했다. 손에 깍지를 끼고 베개마냥 머리 뒤를 받치며 말했다. 나 한 숨 잘란다. 서울 도쿄 춘천 일정이 생각보다 버겁네..
.
.
.
라디오에서 추억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걸걸하면서도 탁한 남성 보컬이 곡을 리드했고 맑은 여성 보컬이 뒤를 받혔다. 미희는 볼륨을 높였다.
와. 이게 언제 영회니? 80년대 맞지? 미희의 물음에
그럴걸? 초인지 중반인지는 모르겠는데..확실한 건 우리 태어나기 전이라는 거..겨울은 웃으며 답했다.
마지막 장면 기억나? 진짜 미쳤지. 주인공이 걸어 들어오는데 내 심장이 사정없이 뛰더라. 아직도 생생해.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 봤던 거 같은데..남자 주인공 품에 안겨 나가는 여자 주인공이 한 번만이라도 돼 봤으면 했었지. 미희는 그 때를 회상하며 웃었다.
겨울은 미희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또 뭔데? 할 말 있음 해. 집에 가서 AI 붙잡고 상담하지 말고. 미희의 말에 겨울은 소리 내 웃었다.
닭살돋는다고 핀잔 줄 것 같아서..겨울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미희가 소리 내 웃었다. 뭐야? 여름씨랑 뭐 있었어? 그러고보니 둘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던데..
아니야 그런거. 아무 일 없었고..내가 얘기하려는 건 네가 말한 그 장면, 영화의 엔딩 같은 느낌을 살짝 받은 적이 있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미희는 전방을 주시하면서도 입으로는 빨리 말히라고 겨울을 재촉했다.
겨울은 여름과 처음 만났던 수년 전, 여름이 카페 직원으로 일했던 자신에게 잠깐만이라도 말씀을 나누고 싶다던 그 날을 떠올렸다.
아..그래. 네가 일전에 얘기했었잖아. 갑자기 들어와서는 냅킨에다가 커피 한 잔만 부탁한다고 썼다고 했나? 미희가 기억난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 그 때 어컵오브커피 님을 찾았는데 매장 안 손님 중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야. 두번인가 세번인가 부르던 차에 갑자기 여름씨가 문을 열고 들어와 사람들을 피해서 돌아돌아 오는데..나 순간 그 영화의 엔딩 장면이 떠오른거 있지? 솔직히 소름돋았거든.
미희도 그 장면을 연상했는지 너무 멋있고 소름 돋는다며 겨울을 부러워했다. 우리 영수씨는 언제쯤 그런 멋진 남자가 될까..넋두리처럼 한 말에 겨울과 미희 모두 크게 웃었다.
겨울아. 노래 들으니 부르고 싶지 않아? 미희의 말에 겨울은 왜? 노래방 한 번 갈까? 라며 반색했다.
.
.
.
겨울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여름은 겨울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다. 영수와 미희는 듀엣곡을 부르자며 핸드폰으로 노래를 찾고 있었다. 겨울은 여름의 시선을 느꼈는지 애써 외면하는 눈치였다. 남자 보컬의 곡을 여성 디바가 리메이크 곡이었다. 상대의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겁이 나 도망친 자신을 탓하며,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슬픈 사연이었다. 여름은 부산에서의 겨울의 노래를 떠올렸다. 발라드는 아름답다. 슬픈 운명일수록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