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춘천으로..(3)

Ep.3 벚꽃 당신

by 정자까야

그렇게 여섯명의 남녀는 MT라도 하듯이 원 모양으로 둘러앉았다. 다들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얘기도 없자 보다못한 경희가 먼저 말했다.

그러니까..우리 쪽에서는 미희가, 그 쪽에서는..저기..아까 처음에 들어오신 분..성함이? 아..네..영수씨..네 영수씨가 각각 이 모임을 주도한거죠? 어찌된 영문인지 두 분이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영수와 미희는 서로 쳐다보다 영수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이건..사실 여름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일본 출장인가 가서 오늘 늦는다고..

여기까지 말하곤 잠시 뜸을 들이자 옆에 있던 병화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예정대로라면 저희랑 같은 시간에 도착했을텐데 무슨 일인지, 비행기가 연착될 것 같다고..카톡으로 알려줬습니다. 너무 늦진 않을거에요. 한시간 이내로 오지 않을까 싶어요.

영수는 말을 받아 아까 하던 얘기를 이어가려 했는데 미희가 손을 들더니 자기가 말하겠다고 부탁했다.

일단 경희와 겨울이에게 미안. 그간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는데 왠지 쑥스럽고..상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관계를 확신할 수 없는 조심스런 기간이라 말 못해서..정말 미안해.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내 친구들..비밀도 없는, 자매보다 더 아끼는 친구들인데..정말 미안했어. 나 사실.. 영수씨랑 만나고 있어. 일전에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 꾸준히 연락하고 지냈어. 근데 나도 그렇고 영수씨도 그렇고 겨울이랑 여름씨 절친이다 보니 말하기가 왠지 조심스러운거야. 우리 관계로 두 사람한테 괜한 불똥이 튀면 어쩌지 그런 걱정들..미안해 겨울아. 정말..

미희는 말해놓고는 펑펑 울었다. 경희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울지 않으려는건지 괜히 천장만 쳐다보았다. 겨울은..말할 필요도 없이 울고 있었다. 정확히는 미희보다도 먼저 울었다. 미희가 영수와 사귄다는 고백을 하는 순간 겨울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미희가 혹시 여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그런 걱정을 했던 자신이 바보같고 친구를 의심한 것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꼈으며 결국 여름과 미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안도감 같은 감정들이 뒤섞이며 둑이 터지듯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미희와 겨울이 부등켜안고 울고 경희는 겨우 눈물을 참고 있는 이상한 상황에서 세 남자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랐다.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웃다가도 이내 시선을 거둬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 병화가 옆에 있는 영수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미희씨 만나는 거 축하한다는 의미 같았다.

한참을 울던 미희와 겨울은 울음 끝에 서로를 바라보곤 웃었다. 그 웃음에 안도해 모인 모두가 웃었다.

미희가 한참만에 다시 이어 말했다.

어느 날 영수씨한테 연락이 왔는데 여름씨가 우리 둘을 만나고 싶다는 거에요.

일순간 다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처음 듣는 얘기였고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특히 겨울은 여름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라며 미희를 쳐다보았다.

카페에서 여름씨를 만났는데 저희 둘에게 부탁을 했어요. 자기를 좀 도와 달라고. 무슨 얘기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런 얘길 하더라구요.

자기가 겨울이에게 자기 회사 조직문화를 얘기해 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선배들이 동기 후배들을 위해 깜짝 파티를 해준 거였대요. 후배들은 선배가 밥 한끼 하자고 해서 나간건데 거기서 뜻하지 않게 자기 동기들을 만나 놀라게 되는..근데 그 얘기를 듣는 겨울이 표정이 너무 부러워하고, 자기는 아마 앞으로도 그런 문화는 경험하지 못할 거라고 체념하는 모습이 보기 너무 안타까웠다고.. 자기가..뭔갈 해줬음 해서 생각한게..겨울이를 위한 이 깜짝 파티였던 거죠. 저한테는 겨울이와 경희를, 영수씨한테는 병화씨랑 희상씨를 부탁한 거에요. 물론 모든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혹시 해서 경희한테도 말 못했어요. 미희는 경희를 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경희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여름씨..처음부터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겨울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하는거 보고 사실 저 감동했거든요. 정말 겨울이만 바라보는 바보 같을 정도로. 그래서 영수씨랑 저. 여름씨를 위해 그리고 겨울이를 위해 정말 연극인으로서 투혼을 발휘한 거에요. 몆 번 위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잘 넘겼어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게, 그리고 다들 놀라서 정리가 안되는 상황인게 우리의 연극이 성공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모두가 침묵했다. 미희 말대로 모두 놀라서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되는 상황인듯 했다. 그래도 비교적 상황 파악이 빨랐던 경희가 한마디 했다.

풍악을 울려야겠군요.

경희의 한마디에 모두 피안대소 하곤 일어났다. 마치 이제 진짜 축제를 즐기자는듯이. 영수와 미희는 머리를 맛대곤 먹을 거며 공간 배치, 캠프파이어를 할 시간 등에 대해 얘기했고 경희도 병화와 희상이에게 다가가 정식으로 인사하곤 서로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겨울은 홀로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겨울은 아직도 이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충동 카페에서 들려준 여름과 후배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그 둘을 연결시켰던 이벤트. 그리고 그 안에 끼고 싶다던 자신의 바람. 여름은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어찌도 그리 잘 잡아냈을까. 가을과 드로잉 카페에 갔을 때 자신이 그렸던 그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춘천의 밤. 모든 것이 현실적인 동시에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모든 것이 논리적인 동시에 그 어느 것 하나 이성적인 것이 없었다.

겨울이 의암호 앞에 나란히 늘어선 벚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희나 경희겠거니 생각하고 돌아보니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몇 번이나 놀란 가슴이 다시 사정없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이 너무 커서 귀가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은 겨울과의 거리가 대화가 가능한 정도가 되자 멈춰서고는 벚꽃을 보고 말했다.

아직도 출근할 때 옷깃을 여밀 때가 있어요. 봄이 왔다지만 몸은 아직 춥다는 신호를 보낸거죠. 봄을 느끼기엔 볕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어요.

여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겨울씨. 벚꽃이 왜 아름다운지 아세요? 처음엔 그 고운 자태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죠. 벚꽃이 아름다운 건 그 미약한 봄볕에도 기꺼이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그 심성 때문이란 걸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상대의 진심을 진심으로 돌려주는 사람. 겸손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사람. 벚꽃은..겨울 당신을 닮은 꽃이에요.

겨울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아무것도 모르게 됐다. 무방비상태로 여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살짝 밀어도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여름은 흔들리는 겨울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밤 하늘의 별빛처럼 눈물은 아름답게 빛났다. 여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여름은 겨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겨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몸을 움직일 의지도 없었고 설령 있다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리라. 여름이 겨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한 방울 눈물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겨울아. 뭐해? 빨리 와. 여름씨 거의 도착했대. 사람들 다 모여있다구. 경희가 부르는 소리가 적막한 글램핑장 곳곳에 울렸다. 겨울은 그제서야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봤다. 경희가 겨울을 찾아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겨울은 고개를 돌려 여름을 쳐다보았다. 겨울에겐 그 찰나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겨울은 경희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뛰어 내려갔다. 여름은 겨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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