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이 드러낸 것에 대하여 [1]

회사원, 독감에 걸리다

by HUN

어떻게 보면 나는 구직에 부단히 실패했으나, 운이 좋아 나쁘지 않은 곳에 안착했다.


꿈꾸던 직무는 아니었지만 전공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기에 그래도 가끔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업무량이 과한 날도 잦았지만, 적당하거나 적은 날도 넉넉했다.

조금이지만 제공되는 숙박비나 복지포인트도 있었고, 틈틈이 사측에서 제공되는 괜찮은 교육도 있었다.


하지만 똑 부러지게 살며, 그래도 부럽다는 시선을 꽤나 받아온 학창 시절은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 현직을 ‘실패’라고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나 보다.


회사에서 서류를 만지고, 업체를 상대하고, 직원들을 돕고 업무량에 짓눌리다가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지시를 받을 때가 있다. 어김없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하는 퇴사심이 분기탱천했고, 평소와 달리 공부 한 자 하지 않았음에도 며칠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불쾌한 감정을 씻지 못하고 며칠 남았던 한 해가 끝났고, 새해에는 하루의 휴무에 하루의 휴가를 더해 4시간도 넘게 걸리는 남해까지 여행을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며칠이나 멋들어지고 조용한 료칸에 있을 수 있다는 행복감만 있어도 모자랄 시간이었다. 하지만 스트레스에 전복되었던 몸은 전년도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지독하던 감기몸살을 다시 끄집어내었고, 몸은 이불 안에서도 편안하지 못했다. 낯선 타지에서 지난 한 주 내 먹던 항생제와 타이레놀 따위를 다시 처방받고, 주사도 한대 거하게 맞아 숙소에서라도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괜찮을 줄 알았다.


금요일 저녁, 여행을 마쳐 피곤한 몸으로 아늑한 집에서 자고 있는데 장판이 꺼진 줄도 모르고 열기가 올랐다. 체온계는 38도를 넘겼고, 뭔가 직감적으로 감기가 아니란 걸 알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몇 안 되는 주말진료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잰 체온은 38도가 조금 못 미쳤고, 의사는 증상을 듣더니 면봉을 코에 넣었다 뺐다. A, B형 독감과 코로나를 한 번에 진단하는 키트였다. 검사 후 초조하게 밖에서 기다리는데 결과는 음성. ‘오늘 밤에도 열이 오른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기운이 나거나 열이 내리는 주사라도 맞혀달라고 떼를 썼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과 증상이 지속되면 익일 다시 병원에 와야 한다는 말을 남긴 채 매달린 노란 수액은 1시간 동안 10만 원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수액은 힘을 쓰지 못했고, 해열제를 먹었음에도 열은 더 올라 밤에는 39도의 체온을 가져야 했다. 밤새 스스로 갈아둔 물수건 덕인지 아침엔 열이 조금 내렸고, 일요일 낮 다급하게 응급실을 찾아 독감검사를 한 끝에 A형 독감을 판정받았다. 페라미플루는 병원에서 맞고 약은 전일받아간 것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페라미플루 덕인지 열은 식기 시작했지만, 몸살은 여전했다. 처방받은 약은 4일분이 남았고, 회사에는 독감으로 병가처리를 해둔 참이었다. 하루는 끙끙 앓고, 하루는 그냥 앓아 화요일이 되니 열이 꽤나 가라앉았다. 점심부터는 해열제를 먹지 않았는데, 37.5도 이상으로 열이 오르지 않았다.


살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진단서 덕에 목요일까지 결재받은 병가가 목에 걸렸다. 수요일과 목요일. 귀하디 귀한 휴식이 당겼지만, 내 앞으로 쌓이고 있을 일들이 걱정이었다. 그 일을 다 처리했다간 다시 몸져누울 것만 같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게다가 인터넷에선 해열 후 24시간은 격리를 하는 게 좋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일단 화요일까지는 쉬어보고 수요일 출근을 고민하자는 마음이 들었지만, 하루가 지나니 같은 생각이 다시 들었다. ‘목요일에 출근해도 충분해!’


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지내는 시간은 전혀 휴식이 되지 못했다. 몸이 점점 낫나 싶었는데,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회사에 쌓인 일을 금요일 하루동안 다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인사일자가 다가오는데 현재 업무도 싫지만 더 최악의 업무를 맡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퇴사를 하고 싶은데 이직을 해야 하는데 불합격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사람하나 만나지 못하고 약기운에 취해 자다 깨기를 반복하니, 부정적인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게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약을 들이밀며 채운 잠은 이상하게 밤잠을 앗아갔고, 사서 하는 걱정은 깊이를 더해 불면을 만들었다. 이미 완료된 결재를 무르기엔 아쉬움과 창피함이 남던 나는 결국 목요일 늦잠을 선택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