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못다한 이야기
저는 태어난 곳은 서울이요 자라난 곳은 오산이라 시골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경기도를 벗어난 기억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래서 흔히 마을의 입구나 중심에서 그늘을 제공하고,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정자나무에 대해서 책으로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자나무가 곳곳의 마을에 있었구나.’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나중에 20대가 넘어가고 이런저런 공부들을 하면서 마을과 함께 자라는 정자나무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정자나무를 본 곳은 강진 월출산 밑 월하마을이었습니다. 마을회관 앞에 서있는 몇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보며 무척 든든한 느낌과 함께 마을을 감싸주는 듯한 따뜻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육지에서는 정자나무로 느티나무를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튼튼하고 장수하는 나무의 대표적인 예라서 정자나무로 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1989년 대한민국 산림청에서 발행한 보호수지에 등재된 노거수 9156그루 중 느티나무가 5048그루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많은 나무는 무엇일까요? 바로 1052그루가 등재된 팽나무입니다.
팽나무는 성장이 빠르며 뿌리가 강건해 강풍이나 태풍, 해풍에 강합니다. 공해, 추위, 소금기에도 강해 내륙과 해안 어디서든 잘 자라지요. 이렇게 튼튼하고 장수하다보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1리마다 이정표로 팽나무를 심기도 한답니다. 당연히 제주에서 팽나무를 정자나무로 삼게 된 이유도 이러한 이유겠지요. 제주 말고도 전라도와 경상도 등 남부지방에서도 종종 보인다고 합니다.
올레길에서 정자나무가 있는 곳은 마을회관 앞이나 마을의 초입 등에 있습니다. 딱 봐도 큰 팽나무가 이러한 위치에 있다면 여지없이 마을과 오랜 세월 함께 늙어온 가장 마을과 친한 나무가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팽나무들은 마을을 상징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과 같은 혜택을 제공함과 동시에 신성시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살며 땅의 기억을 간직해 온 나무는 충분히 신성시될 만합니다. 그래서 마을 초입의 정자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신목으로 모셔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굳이 마을 초입이 아니더라도 아예 오래 된 팽나무를 신목으로 삼아 신당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목으로 모셔져 존경받는 팽나무가 이재수의 난 이전 유일신만을 인정하는 가톨릭교도들에게 잘려나간 것도 신축민란(이재수의 난)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요.
정자나무로 쓰이는 팽나무 아래에는 대부분 비석들이 모여 있습니다. 어떤 비석들인가 하여 살펴보면 ‘재일본월평리출신교포송덕비’, ‘월령리역대리장기념비’, ‘유지청년기념비’, 애향부인기념비' 등이 있습니다. 가끔은 마을의 중심인 초등학교 내에서 ‘잠수송덕비’와 같은 비석들도 발견할 수 있죠. 대체로 비석 뒷면에는 마을을 위해 수고한 사람이나 마을을 위해 기부한 사람들을 기린다는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일하고 나누는 행위를 한, 공동체를 더욱 좋게 만든 이런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비석이죠. 제주의 마을 공동체가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 왔고, 제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애향심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해 베풀고 이를 기리며 비석을 세워두는 마을 공동체원 서로의 따뜻한 마음씨가 정자나무 아래 비석에 담겨져 있죠.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는 사실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과 수탈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수확물을 얻기 힘든 거친 토양과 육지의 잔혹한 수탈 속에서 조금이라도 가진 자가 굶을 위기에 처한 이를 돕는 상황에서 형성된 문화지요.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 없다는 제주의 ‘삼무三無’는 이 문화가 형성되면서 자연히 자리 잡은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남으면 마을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니 도둑이 없고, 마을 안에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도와주니 거지가 없으며, 도둑과 거지가 없으니 대문이 필요할 일이 없는 것이죠. 이렇게 깊은 상호작용을 마을 사람들끼리 하다 보니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어 마을의 웃어른은 나이, 성별 관계없이 전부 삼춘(삼촌), 아랫사람은 조케(조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마을의 모든 이들이 친척처럼 끈끈한 유대감을 가진 공동체 안에 포함되는 이 특별한 문화를 ‘궨당(친척) 문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주올레길을 지나면 무수히 많은 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마을의 중심이나 초입이라는 중요한 공간에서 마을과 함께 세월을 거쳐 온 팽나무들을 만날 수 있죠.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마을 사람들끼리의 따뜻한 정과 유대감이 느껴지는 비석을 볼 수 있습니다. 올레길을 지나면서 허투루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팽나무나 비석들에는 이런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 제주를 걷다 팽나무와 비석을 보게 된다면 잠시 앞에 멈춰 서서 이제 도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오래된 마을의 느껴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