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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ja Oct 17. 2024

고래를 꿈꾸며

<고래들의 노래>

 바다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사실 수영은 엄청 싫어합니다. 귀와 코에 물이 잔뜩 들어가는 수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다는 무척 좋아합니다. 철썩 거리는 파도소리가 좋고 하늘을 반사해 보여주는 아름다운 푸른색이 정말 좋습니다. 어쩌다 에메랄드 빛 바다라도 보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죠. 내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의 바다도 좋지만, 직접 보지 못한 상상의 바다도 좋습니다. 점점 짙어지는 푸른색 사이로 여러 동물들이 지나갑니다. 자연에 적응한 유려한 유선형의 물고기들, 바다의 보석 산호초, 두꺼운 껍질 속의 조개들과 평범함은 거부하는 문어와 불가사리 등등. 많은 동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바다는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존재하기에 더욱 낭만적입니다.


 앞의 동물들도 좋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크고 푸른 낭만적인 바다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물은 고래입니다. 현재 남은 해양 동물 중 가장 큰 고래는 어류가 아니고 포유류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이끕니다. 거대한 크기는 인간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상상과 흥미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고래는 종종 인간의 사냥에 의해 현실로 불려 나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고래들의 그런 수난으로 인해 많은 수가 줄었지만, 그로 인해 인간은 더 많이, 자주 고래를 두 눈으로 마주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 물 위로 떠올라 춤을 추는 고래, 물을 내뿜으며 노래를 부르는 고래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상상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고래들의 노래>에서도 고래를 상상하며 꿈을 꾸는 아이, 릴리가 등장합니다.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는 릴리의 두 눈은 반짝입니다. 이 꿈을 훼방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입니다. 고래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래를 사냥해서 어디에 쓰기 좋은지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릴리의 꿈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옛날 할머니가 고래에게 예쁜 조개껍데기를 건네주었던 것처럼 릴리는 노란 꽃을 고래에게 건네 대화를 청합니다. 해가 떠있는 낮, 고래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어두운 밤. 밤의 고요함은 무서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알 수 없는 신비함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 신비함 속에 고래들은 릴리를 부릅니다. 바닷가에서 고래들과 만난 릴리는 고래들의 춤을 보고, 노래를 듣습니다. 마치 꿈일 것 같은 이 순간. 여전히 고래들은 릴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래와 릴리의 아름다운 경험은 꿈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가끔 꿈보다 더 꿈같을 때가 있는 법이죠. 우리가 적어 놓은 수많은 기록으로도 무한한 세상의 이야기를 다 적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느 해안가에서는 고래들이 자신들만의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육중한 몸이 어두운 바다 위로 떠오르고, 그 위로 달빛이 비추며 몸체와 그림자가 뒤섞인 모습, 세상 모든 것이 침묵하는 그 속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아이. 세상 어딘가에는 역사라는 기록에 있지 않은 이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런 고래와 상호교류를 하고, 고래를 이야기하는 것을 꿈꾼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꿈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꿈이 좀 터무니없으면 어떤가요? 그것이 꿈의 본질 아닌가요? 지금 당장은 이뤄질 수 없더라도 언젠가 경험해보고 싶고, 이뤄지게 만들고 싶은 것, 그것이 꿈입니다. 현실이 눈앞에 닥친 어른들에게 꿈은 사실 너무 먼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이 조그만 현실 속에서도 어른들 또한 꿈을 꿉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을 놓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낭만, 지친 순간들에도 나를 지탱하는 무언가. 저에게는 그 꿈 중 하나가 고래입니다. 별을 수놓은 밤하늘을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 심해를 헤엄치며 유일한 빛이 되어주는 고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온 세상을 다 가보는 고래. 그런 고래를 떠올리면 잊었던 언젠가의 꿈이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너무 힘든 날이면 가끔 아무 생각 없이 고래를 찾아봅니다. 상상 속의 고래부터 다큐 속의 고래까지. 고래들을 마주하는 순간, 세상은 잠시 저에게서 멀어지고, 상상했던 꿈과 저는 하나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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