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버스 컴퍼니 4.5장, 5장 악으로 규정되는> 5-35까지
무언가를 증오해본 적 있나요? 많은 분이 그렇다고 대답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증오’는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싫어해야 하죠. 그냥 한순간의 감정으로 “이건 싫어!”가 아니라 그것 하나로 오랜 기간 나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내몰 정도의 싫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증오에는 늘 애정이 함께합니다. 애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죠.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증오에 애정이 붙다니 말도 안 된다고. 그럼 말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증오에는 애정이 아니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 없이 증오가 생길 수 없죠. 그래서 대부분의 증오는 우리가 잘 아는 것, 혹은 오랜 기간 함께한 것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동족혐오라고 해야 할까요? 거의 모든 증오가 사람에게 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증오가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면대면이 아닌 다양한 미디어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는 현대 세계에서 증오는 파편화된 이미지만 가지고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사람을 미디어에서 보는 일부만 가지고 증오를 키우기도 하지요. 이 예시는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진 채 광기에 매몰된 증오의 부정적인 측면을 아주 강하게 드러냅니다. 물론, 정말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정말 증오할 만하다고 누구나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증오라는 감정에 완전히 빠져버리면 사람은 이성을 잃은 채 부정적 사고에 잠식되어 괴물처럼 변해갑니다. 그래서 증오는 조금, 아니 평생을 살면서 멀리해야 할 감정 중에 하나입니다.
K사에서의 일을 마치고 다음 구역으로 버스가 이동합니다. 남는 게 사람인 둥지 안의 교통 체증은 예상된 바죠. 답답한 교통 체증을 지나 향한 곳은 U사의 뒷골목입니다. U사는 대호수를 끼고 있습니다. 말이 대호수지 도시 밖을 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바다나 다름없는 곳이죠.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모든 수감자가 들뜨지만, 한 수감자는 갑자기 심각해집니다. 늘 배를 타왔다고 말하며,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던 수감자, 이스마엘입니다.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앞의 사례를 보면 황금가지의 위치가 수감자의 과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배를 탔고, U사에 머물렀던 이스마엘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이번 황금가지 수색은 자신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죠.
이스마엘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당최 뭐가 문젠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심각한 얼굴로 이해 안 되는 말만 중얼거리니 서로의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버스를 배로 수리하기 위해 괴물을 잡아 부품을 모아오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지만,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힌 이스마엘 때문에 버스팀의 분위기는 늘 가라앉아 있습니다. 이에 참을성 없는 히스클리프와 이스마엘이 크게 갈등을 일으키고, 이 갈등은 베르길리우스의 평화로운(?) 중재까지 이어졌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얌전해졌지만, 이스마엘은 여전합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굳이 얌전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를 모르겠다고. 이스마엘은 마지막까지 준비를 더해야 한다며 반대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채 설명조차 제대로 못하는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유는 없습니다. 이에 이스마엘은 명령과 계약에만 따르겠다며 버스팀과 갈라서는 모습을 보여주죠.
갈등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채로 배로 개조된 버스는 대호수로 나아갑니다. 대호수에서는 자신의 맘대로 배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 수 있으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한다는 말이 맞겠죠. 대호수는 구역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구역에서 일정시간 있으면 괴물들이 공격해오는 ‘파도’가 몰려옵니다. 또한, 일정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는 방법 또한 정해져 있죠.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규칙’이라고 합니다. U사의 특이점을 이용해 만든 공명굽쇠 또한 상황을 위험하게 만듭니다. 거대한 두 배가 공명하여 달라붙는 동안 주변의 작은 배들을 모두 끌어들이기 때문이죠. 아름답고 낭만적인 바다에는 이런 위험이 숨겨져 있습니다.
수감자들의 노력과 이스마엘의 경험으로 이 위기를 넘긴 버스팀은 황금가지의 사전조사를 맡은 LCCB(Limbus Company Clear Before)팀을 만나기 위해 항구선으로 향합니다. 항구선은 거대한 컨테이너들을 공명굽쇠로 연결해 놓은 일종의 큰 배입니다. 항구이자 배인 그곳의 접선장소에서 비포팀을 찾지만, 비포팀의 일원은 해적에게 납치된 상태였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해적단의 본거지인 클럽으로 향합니다. 이전의 전투에서 이성적인 판단으로 신중하게 움직이던 이스마엘은 이번 전투에서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으로 눈앞의 적들을 전부 죽이는 방법을 택합니다. 감정 없이 확실한 방법을 택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는 사실 분노가 느껴집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다른 무언가는 전혀 보지 못하게하는 분노. 수감자들 중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가장 감정적인 수감자의 모습만 남았습니다.
그녀의 폭주를 막기 위해 단테는 정보를 다 내뱉고 무력화된 적을 죽이려는 행위를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명확히 알 수 없는 목적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녀는 적을 죽이고자 하고, 그 공격을 단테는 적 앞에 서서 자신이 맞습니다. 그렇게 단테가 부상을 입자 수감자들은 난리가 납니다. 아무리 만만해 보여도 단테는 자신들의 상사니까요. 이 때문인지 이스마엘의 폭주는 잠시 사그라든 듯합니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이성적이고 신중하던 이스마엘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합리주의를 행동 원리로 삼고 있다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목표 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목표를 남들에게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중이죠.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그 목표 외에는 인생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삶에 무수한 길들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절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성적으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에 미쳐있는, 목표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방법이 효율이라 불리는 폭력인 것으로 보아 이성보다는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인 듯합니다. 도대체 이스마엘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분노를 따라가면 이스마엘의 목표가 보일 겁니다.
LCCB팀의 생존자를 찾아내 만나 정보를 듣습니다. 황금가지가 바다 위의 구 L사 지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나 다른 팀원들은 뒷골목을 지배하는 ‘손가락’ 중 하나인 ‘중지’를 만나 전멸했다는 것. 그리고 중지도 피할만큼 거대한 재앙이 구 L사를 찾아왔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황금가지가 있는 구 L사 지부의 좌표까지 받습니다. 자신의 일을 다한 LCCB팀의 생존자는 잃어버린 나머지 팀원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얘기를 다 듣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이스마엘도 생존자의 얘기를 뒤에서 듣고, 입술을 꽉 깨뭅니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마음의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이야기겠죠. 아직 자신의 분노에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구 L사까지의 길은 너무 멀고, 대호수의 규칙을 지키면서 가기엔 더 멉니다. 그래서 관리자는 한 번 파도를 맞아보기로 합니다. 하늘이 새까매지고 수면이 요동치며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파도를 밀고 오는 대상은 ‘고래’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 고래는 아닙니다. 인간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는 대호수의 생물을 고래라고 하는 것이죠. 고래는 인간을 삼켜 인어로 만듭니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환상체처럼 인어 또한 인간에게서 비롯된 생물인 것입니다. 이토록 위험한 대호수를 지나며 관리자는 생각합니다. 이스마엘은 이런 위험을 모두 알았기에 더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구 L사 지부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은 흰색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기이한 공포감을 주는 그곳에서 LCCB팀원들은 하얀 무언가로 덮인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기가 찾던 고래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재앙 중 하나인 창백한 고래, 모든 것을 삼키고 다시 뱉어 알 수 없는 흰색으로 뒤덮어버리는 그 고래가 구 L사를 지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창백한 고래의 흔적을 마주하자 이스마엘은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내보입니다. 창백한 고래를 잡는 것만이 자신들의 숙명처럼 만든 한 미친 선장, 그 선장에 대한 미움을 혼잣말로 내뱉습니다. 이스마엘이 갈고 있던 작살은 고래를 잡는 것이 아니라 선장을 잡기 위한 것이었죠.
<모비딕>에서 선장 에이해브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고래 모비딕을 미워하고 또 미워합니다. 세상을 전부 태워버릴 듯한 증오를 가지고, 모비딕만을 찾고 또 찾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원들이 모비딕에 대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죠. 그래서 선장은 선동하고, 열변을 토하고, 금화를 보상으로 내세우며 모비딕을 잡는 것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증오에 잠식된 광기는 또 다른 광기를 낳고 그 열기 속에서 이성은 마비됩니다. 결말은 당연하게도 모두의 사망으로 이어집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재앙과도 같은 모비딕을 마주하고도 전투를 계속합니다. 다시 돌아갈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키워온 복수의 불길은 아름다운 태평양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림버스 컴퍼니의 선장도 이런 광기를 가지고 선원들을 전부 죽음으로 몰았던 모양입니다. 모비딕보다 더욱 강력한 재앙, 창백한 고래를 잡겠다는 광기에 사로잡힌 일념 하나로 모든 선원을 물 속에 가라앉게 했죠. 이스마엘은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선원들을 낭떠러지로 내몬 선장을 원망, 아니 증오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선장과 관련되었으며 자신이 타고 있던 배 피쿼드호를 부수고, 무수한 삶의 끝을 만든 창백한 고래를 찾고 있던 것이죠.
창백한 고래가 황금가지까지 삼켰으니 이제 창백한 고래를 찾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앞을 중지의 간부 ‘작은 형님’이 막습니다. 작은 형님은 너무나 강해 수감자들을 몇 번이고 되살려도 약점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고통스러울 법도 한데 이스마엘은 몇 번을 죽어도 작은 형님을 물리치기 위해 일어섭니다. 하지만, 광기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있는 법이죠.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서 이스마엘의 광기는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상황은 한 커다란 작살이 작은 형님의 어깨에 꽂히며 마무리됩니다. 작살을 던진 쪽배를 탄 노인은 중지를 내쫓아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건물을 삼켜버린 내 고기를 찾고 있네.”
이미 오재앙 중 하나인 모든 것을 꿰뚫는 청새치 고래를 잡은 노인의 별칭은 ‘쪽빛노인’입니다. 도시에서 손에 꼽는 강자 특색 해결사입니다. 그는 창백한 고래를 잡고자 했고, 황금가지를 통해 창백한 고래를 특정할 수 있는 버스팀의 힘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죠. 쪽빛 노인의 참여로 창백한 고래를 쪽빛노인이 잡는 동안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가 황금가지를 가져온다는 계획이 세워집니다.
피쿼드호의 선장인 에이해브가 창백한 고래를 찾는 이유는 창백한 고래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입니다. 이스마엘은 에이해브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 때문에 창백한 고래를 찾고 있죠. 그럼 쪽빛 노인은 왜 고래를 찾고 있을까요? 고래 사냥에 다른 특색인 베르길리우스가 참여하지 않길 바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에서 고래잡이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힐 수 없다는 뜻이네.”
“지도에 그어진 도시, 그 테두리 너머에 있는 외곽까지가 사람이 두려워하여 그어버렸던 선이라면. 그 뒤에는 두려움을 넘어 이해조차 하지 못할 별들이 있는 곳이 있지. 나는 선을 넘어 그 이해에 맞서려는 어부라네.”
한계에 부딪혀 그걸 깨뜨리고, 인간들이 정해둔 선을 넘어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상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을 계속하고자 한다는 말로도 보입니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3달 가까이 물고기를 잡지 못해 젊은 어부들에게는 조롱을, 나이 든 어부들에게는 동정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고기잡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며칠에 걸쳐 전에 본 적 없는 커다란 청새치를 잡습니다. 하지만, 그 청새치를 상어들이 전부 물어뜯어가 뼈대밖에 남지 않죠. 분명 낚시는 실패했지만, 그의 노력에 대한 투쟁은 남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노인은 청새치를 존중하며 낚시를 계속합니다. 사람보다 더 귀중한 존재로 보기도 하죠. 이런 자연에 대한 존중은 자연을 한 번 뛰어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거대한 청새치를 낚은 노인은 자연을 뛰어넘어 낚시에 성공한 것이죠. 하지만, 그의 성공은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상어라는 자연의 힘이 그의 성공을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는 좌절합니다. 하지만, 청새치를 낚기 전의 노인과 낚은 후의 노인은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연에 패배했을지언정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기에 모두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쪽빛 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재앙을 사냥하는 이유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함입니다. 재앙은 자신의 앞에 놓인 한계이기에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뛰어넘으려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적할 수 없는 재앙을 사냥하는 이미 이해에 한참 벗어나 있는 일을 하는 그를 이스마엘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도 사냥하기 힘든 것이 재앙임에도 고작 ‘한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혼자 사냥을 한다니.
둘의 차이는 목표에서부터 명확합니다. 증오를 풀기 위한 복수를 위해 창백한 고래를 찾는 이스마엘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도전하기 위해 창백한 고래를 찾는 쪽빛노인. 이 목표만 보아도 이스마엘은 복수라는 결과에만 도착하면 그만이고, 쪽빛노인은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이 모두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주의적인 이스마엘의 목표는 뭐가 어떻게 되든 결과만 이루어지면 된다는 아주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분노와 증오에 잠식되어 목표만 시야에 잡히는 근시안적인 시야가 눈에 띄지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재앙을 부르는 호수에 무척 오래 있었던 쪽빛노인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과 있었던 이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젠가 결과에 매몰되어 그 결과만이 나를 나타낼 정도로 목숨마저 소중해지지 않는 순간에 이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을 되찾아 돌아오라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관리가 닿는 대호수의 둥지 구역을 넘어 외곽으로 나아갑니다. 거대한 고래들이 잠든 그곳에서 가장 큰 고래가 눈을 뜨고, 그 고래와 마주한 이스마엘은 자기 증오의 커다란 일부와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한 번 이해의 끝에 섭니다. 한계를 맞닥뜨린 노인은 한계와 맞서싸우기 시작하고, 이스마엘과 수감자들은 증오의 중심으로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