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눈이 옵니다. 눈이 내려와 온몸에 쌓입니다. 차곡차곡 쌓이는 눈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손바닥을 내밀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냅니다. 차가운 눈이 녹아 물로 변하여 피부로 스며들고, 채 스며들지 못한 눈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영원한 순환의 자연이 존재하는 세계가 유한한 단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이 순환의 자연은 인간의 짧은 생애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의 존재가 있게 만들어준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현재였던 과거를 불러옵니다.
눈이 무척 많이 내리는 홋카이도. 그 섬에서도 눈이 무척 많이 내리는 어느 산간 지역. 조용한 종착역, 호로마이역이 있습니다. 한때 탄광 산업으로 크게 번성했던 그곳은 이제 폐광으로 인하여 노인들만 사는 조용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쇠락함과 동시에 호로마이역까지 이어지는 지선은 폐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의 역장 사토 오토마츠도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눈이 쌓여도 “열차 출발, 후부 양호, 신호 ok"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모범적인 철도원 그 자체입니다.
유한한 삶속에서 그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철도원. 아버지의 뜻을 따라 패전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주고자 철도원이 되었고, 그 뜻을 잇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계속 후회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일지 모릅니다. 그는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철도원으로서 가장 모범적인 행동을 해왔습니다. 현재가 지나가는 모든 순간에 그는 늘 기차와 역과 함께 했고, 그 기차와 역에 있는 승객들을 생각했습니다. 직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누구보다 대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과거를 늘 떠올립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단 두 사람, 딸과 아내. 가족들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가장 모범적이었기에 가장 미련했던 그는 그 둘이 죽은 후에야 그 둘을 마주했습니다. 가장 현실에 충실하게 살았기에,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기에 역설적이게도 삶의 끝에서 그들에게 작별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병과 죽음은 부조리합니다. 세계는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기에 의식을 가지고 삶에 가치를 만들어가는 인간에게 너무 잔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한 세계의 잔혹함 앞에서 단 한 명의 인간일 뿐인 오토마츠는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살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 나의 삶의 목적, 철도원의 삶. 그 삶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 그의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는 소녀는 인형을 들고 와 철길에서 놉니다. 그러면서 오토마츠의 행동을 따라 하기도 합니다. 그 소녀는 인형을 두고 갑니다. 그 소녀의 언니가 찾아옵니다. 언니는 오토마츠와 대화를 하다가 음료를 얻어 마시고는 화장실로 향합니다. 화장실이 무섭다며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하다가 마지막에 떠나갈 때는 뽀뽀를 하고 갑니다. 제멋대로이지만 무척 사랑스럽습니다.
다음날 눈이 무척 세차게 내립니다.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역으로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영원의 자연이 모든 것을 가려버리고, 유한한 사람의 세계를 잠시만 초월의 세계로 바꿔놓습니다. 세계의 경계가 된 호로마이역에서 한 소녀가 나타납니다. 두 소녀의 언니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무엇보다 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철도를 좋아하고 철도원과 결혼하겠다는 그 아이는 누구보다 행복해보입니다.
막차를 보내고 아이가 끓여준 전골을 먹습니다. 그 무엇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맛에는 죽은 아내가 해준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오토마츠에게 늘 웃음을 지어주고, 죽은 아내와 똑같은 맛을 내는 전골을 끓여줄 수 있는 단 한 명. 바로 딸 유키코(눈의 아이)입니다. 자기를 위해 세 모습으로 찾아와준 딸을 위해 오토마츠는 마지막 진심을 쏟아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현재를 살아왔지만, 현재만을 바라봤기에 두고 온 것들. 그것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딸을 찬 곳에 머무르게 해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나를 누구보다 챙겨주고 사랑해준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 내가 정말 사랑했던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 후회. 그 모든 후회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일만해야 했던 자기에 대한 모멸감. 그 모든 것들을 내뱉고 딸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세계의 부조리 앞에서 현재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회한이 그 무엇보다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그의 일지에 적힌 특이사항 없음은 단 한 번도 맞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늘 구멍이 뚫려있었기에.
딸이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귀신이 되어 찾아왔음에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봐주는 아버지가 전혀 밉지 않습니다. 늘 가족을 마음에 품고 현재를 살아준 아버지가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고맙다는 감사가 서로 교차하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사랑과 사랑이 만나 부조리 속에 만들어진 후회를 풀어냅니다. 눈이 사람의 체온에 만나 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얼어붙었던 마음은 딸의 사랑을 만나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눈이 영원히 손바닥에 남아 있을 수 없듯이 영원과 유한의 만남은 순간입니다. 딸은 아버지가 선물해주었던 인형을 들고 사라집니다. 세계의 우연 속에서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낸 기적이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오토마츠는 이제 현재를 마무리합니다. 폐역이 앞당겨진 지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그에게 끝을 맞이할 자격은 충분합니다. 그렇게 그는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의 영원 속에서 현재를 마무리합니다.
그가 보낸 현재는 늘 모범적인 철도원이었기에 그의 현재는 끝났지만, 그의 과거를 존경하는 이들은 가득합니다. 그의 모든 과거는 잠시나마 눈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현재가 되어 영원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