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사람은 존재한다.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래서 외롭고 고독하다. 그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겨내기 위해 다른 이를 찾고 관계를 맺는다.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여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온다. 다만, 이 자유를 막는 이들이 있다. 광장에 나와 감정과 생각을 나누기를 막는 이들. 그것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곳 바로 북한이다.
북한에서 사람의 존재는 충성하기 위함이다. 이 시대 유일하게 독재 세습을 성공적으로 남긴 국가인 북한에서 백두 혈통에 대한 반대는 곧 반역이다. 반역은 약하게는 강제 노역, 강하게는 사형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부여한 의미와 사상에 의해 사람은 어이없게 죽어나간다. 그럼에도 사람은 의미 없는 세계의 부조리한 현실에서 자유와 사랑을 꿈꾼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어지러웠다. 분단을 원하는 자, 통일을 원하는 자, 미국의 자유를 사랑하는 자와 소련의 평등을 사랑하는 자. 그들의 이상은 모두 아름다웠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현실의 냄새로 썩어나가는 자유는 평등을 인정할 수 없었고, 독재 아래 평등은 독재자한테 충성하는 만큼 평등의 권리가 돌아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욕망의 차별에 곧 익숙해졌기에 많은 이들이 평등 없는 자유를 바랐고, 적응했다. 자유의 현실을 넘어 평등의 이상을 바라며 북으로 넘어갔던 이들은 독재에 충성하며 이상을 다시 굽혔다. 그렇게 지금이 만들어졌다.
사랑에 국경은 없다. 영화 속 스웨덴인 보리와 북한인 복주가 그걸 증명한다. 그들은 정말 어쩌다 만나 사랑
에 빠졌고,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둘은 사랑했고, 세상은 그걸 순수한 사랑이라고 보지 못했다. 도주, 외환 털이, 간첩. 둘의 사랑은 그렇게 보였다. 아무도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었던 복주에 대한 보리의 사랑은 무엇보다 강렬했고, 자기가 위험해질 걸 알면서도 보리를 계속 만나온 복주의 사랑은 무엇보다 순수했다. 하지만, 사상과 권력이 뒤덮은 세상에서 누가 그걸 믿겠는가. 모두가 의심했다. 외로움을 덜어내려 했던 사랑은 모두의 의심 속에서 묻혔다.
눈이 온다. 광장에도 밀실에도. 소설 <광장>의 이명준은 남한의 광장의 썩어빠짐에 실망했다. 이상 드높은 북한의 광장으로 향했지만, 그 광장도 썩어빠져 있었다. 그는 방황하다 한 가지 답으로 향했다.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현실에 막혔지만, 전선의 포화 속에서 운명처럼 사랑은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하기에 전쟁은 그 사랑마저 먹어버렸다. 명준은 어느 광장에 서있을 수 없었고, 밀실에서 자기를 돌보아줄 사랑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존재를 포기했다. 그의 존재는 현실을 떠났다.
의심받은 사랑은 막혔다. 거대한 자연도 막지 않은 사랑을 사람이 만든 사상이 막았다. 보리와 복주가 만난 광장을 막은 것은 자연재해가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은 70여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명준의 길을 막은 사람의 사상이 여전히 보리와 복주의 사랑을 막고 있었다. 보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가장 많이 보장받는 북유럽에서 온 그는 북한에 있는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북한에 남겠다 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복주는 알았다. 이 사회가 이 사랑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그리고 당했다. 보리를 만날 광장으로 나아갈 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사회는 틀에서 벗어난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의 모든 감정 중 세상을 가장 크게 바꾼다는 사랑은 냉혹하고, 잔인한 사상 앞에서 박살났다. 복주는 평양에서 떠났고, 보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리는 미쳐버렸다.
이를 다 지켜본 사람이 있다. 보위부인 명준. 그는 통역가이면서 감시자였다. 보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쳐내고자 했지만, 결국 쳐내지 못했다. 모두의 감시가 돌고 도는 이 소외된 사회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전하는 보리를 쳐내지 못했다. 거짓 보고로 점철된 그의 감시는 보리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보리와 복주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그의 인생을 쓴다. 잘못하면 그의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그 순간에 그는 웃음을 짓는다.
명준이라는 한 사람에 의해 보리와 복주의 광장은 마지막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껴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사랑을 하는 데 국경은 없지만, 사랑을 이루는 데 국경은 있다. 그들의 광장은 거기서 끝난다. 영원을 이야기하던 사랑은 순간의 유한함 속에 사라진다.
소설의 명준은 이를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의 부조리함이 데려간 자기 애인 은혜와 은혜가 품고 있던 딸을 계속 그리워한다. 그 어떤 광장에도 서있을 수 없던 그는 그가 숨을 밀실마저 잃어버렸다. 자기가 있을 장소를 전부 잃은 채 제3세계로 향하던 그는 제3세계마저도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가 원하는 장소는 모두에게 치이는 광장이 아닌 그가 편히 쉴 영원의 밀실이다. 그는 갈매기를 보며 영원의 윤회를 깨닫고, 갈매기로 변해버린 은혜와 자기 딸과 함께하기 위해 고통스런 생을 끝낸다. 자연은 무심하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만든 비극적인 상황에 그 어떤 말과 감정도 덧붙이지 않는다.
보리와 복주의 사랑은 비극이다. 이어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명준의 삶과는 다르다. 그의 삶에서 그는 광장을 잃었고, 사랑도 잃었다. 그는 설 장소를 모두 잃었다. 보리와 복주는 여전히 설 광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그들의 삶은 계속 지속될 것이기에. 그들의 기억 속에 평생 남을 것이기에. 하지만, 그들을 위해 희생한 보위부 명준은 아무런 이득도 없이 자기 삶을 잃었다. 마치 소설의 명준처럼. 하지만, 보위부 명준에게는 자그마한 희망이 남았다. 둘의 사랑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평양에서 추방되었음에도 웃는 그의 미소에는 그 희망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명준은 왜 이렇게까지 보리와 복주를 도와줬을까? 이렇게 대답한다.
“외로워서인가 봐요.”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고독하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태어난 사람은 그저 우주에 있는 아주 작은 한 존재일 뿐이다. 그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무수한 관계들을 맺는다. 가족, 연인, 친구 등등. 죽음으로 향하는 삶에서 그 관계들은 무척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고독 속의 고통을 버티는 것이 더 힘든 존재다. 그래서 관계 맺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방인으로서 극도의 소외를 느끼며 애정을 갈구한 보리와 감시 속에서 인간적인 애정을 주는 보리를 내치지 못한 복주와 명준처럼.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대화한다.
인간이 어떤 목적도 본질도 가지지 못한다는 실존의 끝에 존재하는 것이 관계와 사랑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저 던져진 존재라고 말하며 선택할 뿐인 인생을 말하던 사르트르가 현생에서 관계에 집착하던 이유도, 아무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느라 헤매는 사람들을 비판하던 카뮈가 모든 실존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을 말하던 이유도 전부 그곳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광장을 찾는다. 고독이 싫어서, 그리고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