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퇴근한 후 밤에 쉬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이를 우리는 일상이라 부릅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안심감을 주지만, 지루함도 줍니다. 일상은 분명 삶을 지탱하는 것이지만,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려 여행을 떠납니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 여행은 일상과는 다른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우리에게 처음부터 일상이란 것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無)로부터 왔습니다. 어쩌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존재의 의미도 모른 채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주의 나이가 우리가 예측한 것처럼 약 138억 년이라면 현생을 고작 100년만 사는 우리에겐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간이 더욱 길었을 것입니다. 사실 영겁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모든 순간이 우리에겐 여행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드는 생각과 감정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죠.
영화에서는 여름과 겨울을 소재로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합니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 그를 바라보며 있는 소년·소녀, 강렬하게 들이치는 비바람, 그 사이를 뚫고 수영하는 청춘들에서 알 수 있는 여름과 잎이 져버린 벌거벗은 나무들, 길게 몰아치는 눈보라, 세상의 어느 것도 다가오지 못하는 어둠 속의 침묵,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쌓인 길이 보여주는 겨울. 여름과 겨울을 겪고 있는 이들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행하고 있다는 것.
여름과 겨울이 반복되듯이 삶은 반복됩니다. 큰 틀에서는 사실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각본을 쓰는 주인공도 새로이 일본에 왔을 때는 그 생경함에 매순간이 여행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일에 묶이면서 여행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산에서 평창, 평창에서 전주를 오가면서 일상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일을 하다보면 타성에 젖어 여행보다는 그냥 일을 하고 있는 기분만이 듭니다. 지루하고, 가끔은 허무한 기분마저 듭니다. 느낌을 주지 못하는 말에 묶여버린 대본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돈에 묶여버린 일은 모든 나날들을 비슷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잊습니다. 그 나날들은 비슷할 뿐이지 분명 다르다는 것을요. 주인공의 겨울 여행은 분명 특별합니다. 산속의 여관에서 묵고, 옆 마을에 가서 잉어를 훔쳐오고, 그것 때문에 경찰에게 혼나는 그런 여행은 쉽게 경험하지 못할 일입니다. 일상에 지쳐 있던 주인공에게 그것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간만에 즐거움을 느꼈다 말합니다. 말 그대로 반복의 바깥에 서니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며 평소에 느끼지 못한 감정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상에 불과할까요? 우리는 이미 여행 중입니다. 매순간이 사실 새로울 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대화를 해보려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일상은 조금씩 비틀립니다. 다른 점들이 새롭게 다가오고 우리에게 웃음을 줍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은 우리의 모든 나날들에 들어와 지루함을 사라지게 합니다.
여행 중이라고 느끼지 못할 너무 힘든 날들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날들. 시간이 지나감에도 반복된다고 느껴지는 날들. 그때 우리는 기억의 이미지들을 꺼내듭니다. 조각조각난 이미지들을 기워 추억을 그려냅니다. 그 추억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여행을 했는지를 떠올려봅니다. 대단한 장기 해외여행이 아닐지라도 옆 동네 놀이터를 방문하고, 새로운 도서관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던 추억. 우리의 삶에서 늘 함께한 여행의 나날들입니다.
아마 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의미 없는 말들을 직장에서 내뱉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일상의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니까. 그 말들은 어쩌면 어디에서 반복된 말들일지도 모릅니다. 말에 삶이 묶여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그 말들을 통해 맺은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은 매번 새롭습니다. 그 감각과 이미지, 그리고 그것들이 이어지는 기억 속에서 일상의 지루함은 사라지고, 여행의 새로움이 남습니다. 삶의 나날들은 다채로워집니다.
머리는 비로 온통 젖고, 걸음이 지나온 길에는 눈이 파인 발자국이 남습니다.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고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일상과 여행의 순간들은 삶의 일부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매순간이 같을 수 없기에 같은 나날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루함, 즐거움, 기쁨, 슬픔, 어색함, 친근함, 쉬움, 어려움 등의 감정들 속에서 삶의 나날들은 우리와 늘 함께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아름다운 여행은 멈추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