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정의의 사람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오후 전시실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밖은 춥고, 하늘은 맑았지만, 안은 온풍기의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건드리고, 하얀 벽들에 밖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앉아 늘 그렇듯 옆의 근로장학생과 대화하고 있었다. 배고픔은 없지만, 피로는 있어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대화 소재가 비슷한 학생도, 제법 친한 학생도 아니기에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잘 말을 걸지 않던 그 학생이 먼저 대화 주제를 꺼냈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밥 먹는 이야기였다. 집에서 무얼 해 먹고 있는지에 대한 간단한 얘기. 그릭요거트에 그래놀라를 섞고, 에스프레소를 넣으면 티라미수 맛이 난다는 이야기나 빵에 발라먹을 스프레드가 떨어졌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묘하게 밝고 위안이 되었다.
며칠 전엔 다른 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은 한 번 입이 트이면 말을 많이 하는 학생이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같이 사는 동생에 대한 이야기. 빨리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불평불만은 하지만, 동생과의 친함이 나름 느껴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도 밝고 위안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두 이야기는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고, 내 기억의 풍화 속에서 스러져갈 이야기들이지만,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밝고 따뜻했으며, 조금이지만 미소가 지어졌다.
왜 그랬을까? 정말 사소한 그런 것들이 내 맘을 끌었던 건 그것이 눈부신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지워져 가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 말의 묵직함 속에서 고민해서 던져야 하는 어려운 이야기들이 아닌 가벼움 속에 삶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얻었지만, 부럽기도 했다. 눈부신 삶이 지금 나에게도 있다고 되뇌고 달래는 내가 보여서.
살을 빼는 데 성공했다. 전주에 오기 직전보다 10kg 이상 빠졌다. 슬슬 빠지는 것을 조절할 때가 되었는데 한 번 빠지기 시작한 살이 마치 관성을 가진 것 마냥 계속 사라져 간다. 원래는 맞지 않았던 바지가 이제는 흘러내리기 시작할 정도다. 그런데 막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전에 점심에 밥을 두 그릇 먹고. 저녁에 김밥 두 줄에 라면 두 개를 끓여 먹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탕수육 몇 조각 먹었다고 느끼함을 넘어선 역함이 위에서 목구멍을 타고 넘어와 입을 감돈다. 먹는 것은 사람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딱히 해야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유전자는 생존하여 후손을 남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지만, 사람은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존재다. 자기가 선택하고 나아갈 수 있는 존재다. 다만, 그 나아감의 결말에 죽음이 있다는 것은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진짜 선택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선택 속에서 끝을 향해 가는 걸까? 그냥 우리가 시간이라 명명한 자연의 법칙이 만들어 낸 흐름이 우리를 끝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 개인의 생존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이들이 있다. 정의(正意)를 추구하는 이들. 사람의 유한한 삶을 생존에만 사용하지 않겠다는 이들이 있다.
폭정을 펼치는 독재자가 있다. 독재자를 죽이고자 하는 이들이 모였다. 그들의 목표는 일단 독재자를 죽이고 그 혁명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로 나아가는 정의는 다 다르다. 야네크는 열성적인 혁명가다. 폭정을 없애고자 하지만, 그것은 증오가 밑바탕이 아닌 세상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이다. 스테판은 폭력적인 혁명가다. 증오를 밑바탕으로 혁명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도라는 가장 따뜻한 혁명가다. 혁명을 중요시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사랑에 대한 관심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보리아는 포용적인 혁명가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모든 정의의 의견을 들어주고 중재하려 노력한다. 알렉시스는 겁이 많은 혁명가다. 그녀는 중대한 테러를 눈앞에 두고 도망쳤다. 하지만, 비겁하지는 않다. 혁명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으므로.
이들의 정의는 전부 다르기에 계속 갈등을 벌인다.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야네크는 차갑고 폭력적인 스테판과 무조건 부딪힐 수밖에 없다. 명예와 인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혁명을 하고자 하는 야네크와 혁명만 이룩하면 뭐든 상관없다는 스테판은 첫 번째 테러 실패에서 크게 부딪힌다. 아이들이 있어 폭탄을 던지지 못했다는 야네크의 말은 목적주의자들의 말에게는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을 부분이다. 그래서 스테판과 맞붙는다.
이들이 이렇게 갈등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의로 삶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삶으로 이뤄지는 것들에 더욱 집착한다. 삶을 버려서까지 만들어낼 사상이 그만큼 의미가 있어야 한다. 삶의 지옥 끝까지 맛보고 온 스테판은 부정적인 삶보다 이뤄낼 혁명이 긍정적이다. 하지만, 야네크는 그렇지 않기에 내 삶을 전부 건 혁명의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 혁명의 성공은 그들의 삶의 끝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
정의를 추구하기에 야네크와 도라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정의의 추구는 혁명으로 이어지고, 혁명은 삶을 죽음으로 내던짐으로써 이룩할 수 있다. 정의는 그래서 차갑다. 현실을 개변하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따뜻한 삶을 던지는 것은 차가움만이 등 떠밀어 줄 수 있다. 따뜻함을 버리고, 차가움을 택한 야네크는 정의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삶을 버렸다.
정의는 높고 아득하며 숭고하다. 대신 지독하게 차갑다. 여기 다른 이야기가 있다. 과거의 삶에서 가져온 뜨거움 속에서 차가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상상 속에서 가져온 차가운 삶에서 따뜻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피는 황야의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늙어버렸다. 무척 억울하고 속상하며 화가 날 테지만, 그녀는 무척 긍정적이다. 늙은 몸에 적응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허수아비를 구해주고, 하울의 성에 들어가 거기 살고 있는 이들과 관계를 쌓아 올린다. 따뜻한 마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립하는 이들마저 포용한다. 늙어버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황야의 마녀나 하울을 잡아가려는 스승 설리먼의 강아지 힌이 그렇다. 전쟁이 일어나는 차가운 세계관 속 가장 대비를 보여주는 소피는 따뜻함을 통해 모두의 마음에 들어간다.
일상을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던 소피에게 하울의 성에서의 일상은 매번 새로운 것들뿐이다. 아름다운 강변에서의 빨래와 피크닉, 바다와 그 앞의 새벽시장, 화려하고 호화로운 왕도. 이 모든 것들은 따뜻하지만 단조로웠고, 편안하지만 묶여있던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녀는 이 순간에 감사한다. 삶에 감사하고, 마주한 자연에 감사한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아름답게 빛난다.
그녀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다. 자기는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젊음을 잃었고, 죽음은 턱밑까지 쫓아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간다. 아니,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삶에는 큰 목적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의 헛된 본질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부조리를 직시하며 인간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합리나 초월에 기대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은 평화롭고 따뜻하지만, 가장 완벽한 실존이다. 그녀는 유한한 삶을 알차게 쓰며 세상이 일으키는 변화에 알맞게 대응한다. 그녀는 정의의 사람들과는 달리 삶을 이어나가며 많은 것들을 얻어나간다.
삶을 버리면서 정의를 얻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야네크는 폭탄을 던졌고, 붙잡혔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 그는 뭐가 됐든 어떤 목적을 위해서 건 사람을 죽였다. 분명 그는 폭정과 독재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눈앞에 당장 남은 것은 폭탄에 갈가리 찢긴 시체다. 죄책감과 절망감, 슬픔이 그를 덮친다. 하지만, 그의 정의만큼은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정의를 흔드는 것은 인간이 만든 인간을 옥죄는 합리와 인간이 우주와 같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해 만든 초월이다.
소령 스쿠라토프가 들어온다. 그는 정의를 걷어내고, 현 사회의 합리를 상징하는 법을 말한다. 야네크와 동지들이 말하는 정의 이전에 사회가 정해놓은 정의를 말한다. 야네크가 한 것이 살인이다. 폭정에 대한 살인 이전에 그냥 한 사람을 죽인 살인. 그걸 야네크도 모르지 않는다. 사회를 뒤덮는 인간이 만들어낸 합리를 이용해 야네크의 정의를 죄책감으로 침범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죄책감이 야네크의 마음을 뒤덮는 순간 자기의 정의를 향한 유한한 삶이 의미 없어질 것임을 알고 있는 야네크는 넘어가지 않는다.
합리는 이성적이지만, 따뜻하지는 않다. 여기 가장 따뜻하다 불리는 초월, 신의 품이 있다. 성호를 그으며 테러에 참여한 야네크도 초월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초월이 저 멀리 어딘가의 무엇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옴을 알고 있다. 총독을 잃은 총독 부인은 슬픔과 분노를 야네크에게 쏟아붓는다. 그녀는 회개를 말한다. 야네크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삶의 유한함을 알고 그것을 정의에 사용한 야네크에게 하느님이란 초월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앞의 유대, 사랑은 그저 헛된 것일 뿐. 그에게 유대, 사랑은 동지들과 함께하는 현재에 있다. 삶이 소중하기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정의를 이룩하고자 가장 소중한 것을 사용했다.
삶의 유한함을 알기에 자기 뜻을 관철하는 야네크의 모습은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그의 정의가 틀릴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을 빼앗은 대가로 자기 삶을 내놓았다. 삶에 등가교환이 성립할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야네크는 야비하고 비열하지는 않다. 그 당당함이 더욱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행하는 정의는 결국 그가 죽음으로써 순수함을 완성할 수 있기에. 그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온전함을 증명할 수 있기에.
삶을 버려 정의와 다른 것들과의 대립에서 자기 정의를 증명한 야네크와는 달리 소피는 삶을 이어감으로써 다른 것들과의 대립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증명한다. 그녀는 어떤 고난의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리먼이 강한 압박을 주며 하울을 데려가려 할 때도, 전쟁의 광풍이 자기 마을을 덮쳐도, 황야의 마녀가 하울의 심장을 가져가도 마지막까지 나아간다. 그녀는 그녀와 관계 맺은 모두를 향한 사랑을 전달한다. 마지막엔 자기와 하울의 삶을 괴롭히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벽마저 부숴버리고, 모두와 행복하게 사는 삶을 쟁취한다.
상상의 이야기지만, 삶에 대한 의지가 돋보인다. 부조리한 인생의 순간에 앞으로 다가오는 선택들, 우연 속에서 해낸 선택을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내면서 전쟁과 같은 거대한 격류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속한다. 그 기반에는 사랑으로 이룩한 따뜻한 관계가 있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미 해냈고, 앞으로도 해낼 발걸음이 그녀의 삶을 더 아름답게 할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찾아오겠지만, 그전까지의 삶은 무엇보다 빛나 꽉 닫힌 해피엔딩이 될 것이다.
상상의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정의의 사람들>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결과만 놓고 보자면 해피엔딩이라 절대 볼 수 없다. 야네크는 교수형을 선택했다. 그 어떤 것과의 타협도 거부했다. 삶을 자기 정의를 위해 바쳤다. 그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도라는 그것이 무척 슬프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지 않고는, 사랑하지 않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야네크의 뜻을 이어받는다. 그런 도라를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원래도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화해와 사랑을 통해 동지라는 유대감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야네크의 죽음을 통해 더욱 순수한 정의를 가지고, 하나가 된다. 야네크의 소중한 삶을 빛내고, 그들의 삶을 빛내는 길을 향해 찾아간다.
이 선택 또한 끝이 죽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삶의 유한함을 모른다면 자기의 정의라는 대의를 위해 삶을 바치는 것에 이리 결연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의를 향해 계속 고민하고 갈등할 것이다. 하지만, 미궁 속에서 삶을 헤매는 미노타우르스와 달리 정의와 삶의 소중함이라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가지고 나아가는 정의의 사람들은 삶을 빛내는 테세우스가 될 것이다. 죽음은 미궁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삶을 완성시킨다. 그리하여 그들이 정의라는 입구를 향해 지나온 미궁의 길은 더욱 빛난다.
죽음을 선택한 이들도 언젠가 자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이도 두 이야기에서 삶의 유한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세상의 무정함 속에서 세상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인간의 부조리를 명확히 알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그들은 그저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서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는 가슴에 뜨거운 사랑을 품고, 누군가는 머리에 차가운 이상을 품고 앞으로 나아간다. 영원과 초월을 쫓지 않고, 흙바닥과 벽돌을 디디며 현실의 걸음을 걷는 이들은 자기의 앞에 놓인 것들을 힘차고 당당하게 따라간다.
이 따라감이 어쩌면 헛될 수도 있다. 아무 의미도 없이 인생의 회전목마 위에서 돌고 도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전목마 위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남길 수 있다. 옆의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삶의 기억을 충실하게 만들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마음은 충만해진다. 다시 전시실 안내데스크에 앉는다. 긍정적인 일상의 얘기들이 다시 마음을 밝힌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생각한다. 굳이 내 삶을 무엇이라 정의하고 평가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가끔 의미 없고, 헛되어 보이더라도 유한한 삶은 현실을 걸으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으니.